"결코 제가 살고자 함이 아닙니다. 우선 당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지난 5월 대선에서 국민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성원을 생각하면서 자숙하고 고뇌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백여 일간의 괴로운 성찰의 시간은 물러나 있는 것만으로 책임질 수 있는 처지가 못됨을 깨우쳐줬습니다. 지금 국민의당이 몹시 어렵습니다. 당 자체가 사라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엄습하고, 절망과 체념이 당을 휩싸고 있습니다...(중략)...조국을 구하지 못하면 살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넌 안중근 의사의 심정으로, 저 안철수, 당을 살리고 대한민국 정치를 살리는 길로 전진하겠습니다."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결국'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안 전 대표가 8.27 국민의당 전당대회에 출마할 것이라는 '설'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30일 전후다. 김철근 구로갑 지역위원장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전날 안철수와 만나 원외 지역위원장 109명의 출마 촉구 서명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제보조작 사건으로 큰 내상을 입은 안 전 대표가 원외지역위원장들의 출마 권유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이 정가에 돈 것도 그 즈음이다.
설마했던 안철수의 국민의당 당권 도전이후 안 전 대표의 행보는 전에 없이 빨라졌다. 박주선 비대위원장과 김동철 원내대표, 박지원 전 대표와 천정배 의원 등 당내 중진들과 잇따라 만나 거취를 논의하는가 하면, 초·재선 의원들과 회동해 전대 출마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했다. 안 전 대표가 당 관계자들과 연쇄 회동을 가진 것은 자신의 출마를 설득하기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출마 선언 전 당 관계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협조를 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설마' 했다. 대선 패배 이후 채 석달이 지나지 않은 시기에, 그것도 대의민주주의와 선거제도를 뒤흔든 제보조작 사건의 후폭풍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점에 안 전 대표가 당권에 도전한다는 것이 너무나 성급하고 무모해 보였기 때문이다. 정국을 뒤흔든 제보조작 사건에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원점에서 정치인생을 돌아보며 자숙과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고 고개를 숙인 것이 불과 3주 전의 일이다. 이 점을 상기하면 안 전 대표의 거취는, 솔직히 그 답이 너무나 뻔했다.
그런나 안 전 대표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제보조작 사건 사과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안 전 대표는 당권 도전을 천명했다. 당 안팎의 비판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안 전 대표가 당권에 도전하는 이유는, 그 스스로 밝힌 것처럼 "당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작금의 국민의당은 침몰하는 배요, 동력이 꺼진 비행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바닥까지 떨어진 지지율은 반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대안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이번에 당권에 도전장을 내민 인사들의 면면도 특별함이 전혀 없다. 시쳇말로 '그 나물의 그 밥'이다.
안 전 대표 역시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다. 당이 주저앉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을 터다. 그러나 안 전 대표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그 "절박함"이 당권 도전의 명분이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안 전 대표가 출마 선언을 하자 당장 당 내부의 분열이 격화되는 양상이다. 주승용 전 원내대표 등 12명의 의원들은 안 전 대표의 출마 회견에 앞서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동교동계는 집단 탈당의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박지원 전 대표와 김동철 원내대표 등 그동안 꾸준히 안 전 대표의 출마를 반대해온 당내 인사들 역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안 전 대표의 출마를 국민이 어떻게 인식하느냐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 전 대표의 정치 재개가 당은 물론이고 본인을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악수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의당과 안 전 대표의 초라한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더욱이 안 전 대표는 대선 패배와 제보조작 사건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물론 지난 대선 패배와 연이어 터진 제보조작 사건, 그로 인한 당의 몰락을 안 전 대표만의 책임으로 전가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작금의 위기를 안 전 대표를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바뀐 목소리보다 더 실망스러운 안철수의 새정치특히 국민의당을 추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보조작 사건의 경우, 안 전 대표의 책임이 막중하다 할 것이다. 제보조작의 핵심 인물인 이준서 전 최고의원과 이유미씨가 안 전 대표를 따르던 인사인 데다, 그 자신은 대선 과정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대선후보였기 때문이다. 검찰의 조사 결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전 대표의 정치적·도의적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다. 그렇기 때문에 안 전 대표 스스로 "책임은 전적으로 후보였던 제게 있다"며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이래 저래 말들이 많지만 국민의당은 누가 뭐해도 안철수의 당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박지원·박주선·김동철'의 입보다 '안철수'의 입을 더 주목한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 자성과 성찰, 책임을 강조하던 안 전 대표의 입에서 돌연 '선당후사'라는 오금 저리는 정치적 수사가 튀어나왔다. 제보조작 사건을 사과한 지 불과 3주 만에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
막스 베버가 강조했던 "책임윤리"를 정치적 신념으로 여긴다는 안 전 대표의 다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절박함을 강조한다 한들 안 전 대표의 행태는 자가당착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당내 인사들도 이해 못하고 있는 안 전 대표의 당권 도전을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수긍할지 의문이 드는 이유다.
지난 대선에서 안 전 대표는 목소리를 바꿔 화제가 됐다. 부드럽고 자분자분했던 목소리는 어느덧 거칠고 굵은 쇳소리로 바뀌었다. 안 전 대표의 목소리 변신은, 그러나 공감을 별로 받지 못했다. 거부감을 느낀다는 반응이 외려 더 많았다. 아마 몰랐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안 전 대표에게 기대한 것은 귀에 거슬리는 어색한 목소리가 아니라 기존의 정치 문법과 차별화되는 진짜 '새 정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권 도전에 나선 안 전 대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당권 출마의 변으로 내세운 명분들이 과연 합당한 것이냐고.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것은 아니냐고. 당내 인사들조차 설득하지 못하면서 국민을 어떻게 납득시킬 생각이냐고. 대한민국에 '안철수 광풍'을 일으킨 '새 정치'의 참신함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이냐고. 목소리는 도대체 왜 바꾼 것이냐고. 거듭 묻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