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장개석은 모택동에 패배했을까나는 십수 년째 근현대사 공부를 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지고 사진 자료를 수집하여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 2, 3>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한국전쟁 Ⅱ>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 <약속>이라는 작품도 발표하였다.
이즈음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한국전쟁 비망록으로 다음 세대에 보여주고 들려주고자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이라는 주제로 카카오(다음)에 스토리펀딩과 함께, 이를 <오마이뉴스>에 동시 연재하고 있다. 이 연재가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한 권의 책을 엮어낼 계획이다.
나는 한국전쟁을 10여 년째 공부하면서, 그리고 어린 시절에 겪었던 한국전쟁을 반추하면서 가장 큰 의문이 있다. 왜 국군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인민군에게 내주었으며,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일방적으로 밀려났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리고 모택동(마오쩌둥)의 공산군보다 10배나 군사력이 강했던 장개석(장제스) 군대가 왜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 갔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 까닭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한두 마디로 요약하면 '병사들의 사기'와 '대의명분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전쟁 문제는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에서 더 심도 있게 다루기로 한다.
먼저 이 기사에서는 장개석 군대의 패배 원인을 알아보고, 이즈음 날씨보다 더 뜨거운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박찬주 대장 공관병 갑질 문제의 해결방법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국공) 내전 기간에 전략적인 우세가 공산군 쪽으로 기울어 연전연패하자 장개석은 놀라고 분해했다. 1947년 6월, 그는 말하기를 "어떤 면을 놓고 말하더라도 우리(국부군, 일명 국민당군)가 (공산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군대와 장비, 전투기술, 경험이라는 점에서 보아도 공산군은 우리와 비교할 수가 없다. 식량, 사료, 탄약 등의 군사적 공급과 보충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공산군보다 10배나 풍부하다"라고 하였다. 7개월 뒤인 1948년 1월에 가서도 장개석은 아직도 "물자 면에서는 우리가 좋은 장비와 우수한 무기를 갖고 있다. … 그러나 왜 우리의 공산군 토벌(작전)은 계속 패배하고 실패하는가?" -로이드 E. 이스트만 지음. 지식산업사.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233~234쪽 중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개석 군의 부패상장개석이 자신의 군대 실상을 제대로 알았을 때는 이미 국부군은 와해 직전이었다. 장개석 군대의 부정부패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인 꼴로, 심지어 국부군 간부들은 미군이 원조한 무기와 탄약을 빼돌려 모택동 공산군에 팔아넘기는 사리사욕을 취했다.
그 결과 자신들이 판 총알이 자기네들에게 날아와 패전을 재촉했다. 게다가 장개석 국부군 군대의 민폐는 말할 수 없었으며, 부대 이동 때는 위안부들을 부대 후미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모택동은 군과 인민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 즉 수어지교(水魚之交)로 공산군이 중국 인민 민가에서 닭 한 마리라도 훔치는 민폐를 끼치면 즉각 사형을 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모택동 군대는 전투 중에도 쉬는 시간은 틈틈이 인민들에게 노력봉사를 아끼지 않았다니, 인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 마련이었다.
내가 1970년 겨울 경기도 파주군(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라는 곳에서 캡(CAP)소대장으로 복무할 때였다. 산중 땅굴 막사에서 지내니까 바닥에서 솟는 습기를 제거하고자 짚을 깔고 지냈다. 거기다가 강추위로 난로를 피우자 먼지가 일어나 목구멍이 아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해결 방안으로 소대원에게 멍석을 짜서 바닥에 깔라고 지시를 했더니 며칠 뒤 멍석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 멍석은 한밤중에 마을에서 훔쳐온 것이었다. 후일 부대 이동 때 그 멍석을 주인에게 돌려준 바 있었다(관련 기사:
물건 훔친 부대, 양심적이라고 칭찬받다).
부대 이동 후, 그 멍석 주인을 우연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분은 그때 기침이 심한 70대 노인이었는데 나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내가 산골에 살면서 6.25 때 국군, 유엔군, 인민군, 중공군(중국군) 등을 다 겪어보았는데, 그중에 중공군들은 절대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오."당시 나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최근 중국군의 항미원조전쟁 문헌을 들추면서 공산군이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숙하는 사진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것이 10배나 강한 국부군을 물리친 원동력이라는 것도 알았다.
장개석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배한 이후 마침내 대만으로 쫓겨 갔다. 장개석은 그제야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때부터 국민당 정권 안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가족들에게 절대로 부정에 연루되지 말라고 수차례 경고했다.
그런 가운데 장개석은 어느 날 그의 며느리가 밀수에 관련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며느리가 집을 비운 사이 수사기관에게 압수 수색을 지시했고, 그 결과 엄청난 보석을 발견했다. 장개석은 그 보고를 받은 후 며느리를 불러 밥을 사주며 "이게 마지막 식사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식사가 끝나자 장개석은 며느리에게 보석 상자를 선물했다. 그 며느리는 집에 돌아가 상자를 풀어보니 거기에는 '권총'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때부터 대만 국민들은 장개석과 국민당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문 대통령에게 드리는 고언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 역사적 교훈과 함께, 이를 원용하여 총알 두 발이 장전된 권총을 박찬주 대장에게 보내라고 전해드리고 싶다. 만일 나의 청을 자결 교사죄로 현행법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박찬주 대장을 국기문란범으로 당장 체포하라고 청하고 싶다.또한 만약 그의 죄가 사실이라면 육군 이등병으로 강등시켜 전역시키기를 청원드리는 바다.
그래야만 부정부패가 만연된 군대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군의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적기다. 이대로 어물어물 넘어간다면 우리 국군은 백성들의 신뢰를 영원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갑질' 논란으로 이름이 알려진 박찬주 대장은 군의 기강을 위해, 모교 육군사관학교의 명예를 위해, 앞으로 우리 국군이 '국민의 군대'로 사랑받기 위해 군인다운 처신을 해주기를 군의 선배로서 간곡히 바란다(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육사 출신은 아니지만 102학군단 출신으로 1969년에 육군소위로 임관했으니 어쨌든 군의 선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