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병에 대한 갑질 문제로 비판을 사고 있는 박찬주 육군 대장. 군부 사조직 독사파의 멤버로 알려져 있다. 1977년 육사 37기로 입학한 그는 독일 육사에서도 수학했고, 대령 시절에는 독일 육군청에 교환교관으로 갔다. 이런 인연 때문에 독일 육사파 즉 독사파가 되었다.
독일은 1806년 나폴레옹 군대에 패해 그 영향권에 놓인 적이 있다. 동일한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그 후 독일은 정예 장교 양성에 주력했다. 강군을 만들 목적으로 장교 교육 시스템 구축에 열정을 쏟았다. 이것이 한 가지 동력이 되어 독일군은 급속히 강해졌고, 20세기 초반에는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일으켰다.
세계대전에서는 패배했지만, 독일군의 장교 교육 시스템은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한국군이 독일을 유학 대상 지역 중 하나로 이용하는 것이다. 박찬주 대장이 독일에 유학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박찬주 대장을 포함한 독일 유학파 장교들이 독사회란 사조직으로 뭉쳤다는 이야기는 지난 6월 2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제기됐다. 인터뷰에 나온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독사회 중심인물은 육사 28기(1968년 입학)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이다. 홍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김관진 전 안보실장이 스스로 사람들을 모아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군내에서 오랫동안 보직을 차지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로 사적 관계나 인적 관계가 맺어지지 않았겠나? 특히 김관진 전 안보실장은 독일 육군사관학교 유학을 갔다 왔다. (김관진이 군부 인사권을 좌우한 지난 10년간) 독일 육군사관학교 연수를 갔다 오거나 유학을 했거나 공부하러 갔다 온 사람들이 다 중용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독일 사관학교 출신이라고 해서 독사파라는 말이다."
독사파에는 55명 정도가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관진 전 실장을 비롯해 김태영 전 국방장관, 유보선 전 국방차관, 하정열 전 3군 부사령관, 류제승 전 국방부 국방정책실장 등이 멤버라고 한다. 독사파 멤버들 중에는 사드 보고누락이나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방산 비리에 연루된 이들이 있다고 알려졌다.
독사파와 알자회그런데 박근혜 정권 하에서 대통령 측근과 연루된 군부 사조직이 독사파 하나만이 아니다. 작년 12월 22일 최순실 국정조사 제5차 청문회에서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증인으로 출석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사조직에 관한 질문을 했다.
박범계 의원의 입에서 나온 사조직 이름은 알자회다. 1974년에 입학한 육사 34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알자회는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이들은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수도방위사령부, 청와대 경호실 등의 요직에 진출했다. 이때부터 "알자회가 아니라 알짜회다"라는 말이 나왔다. 이들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로 잠잠했다가, 박근혜 정권 들어 다시 승승장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문회에서 박 의원은 우병우·안봉근 전 비서관이 육사 출신의 기무사령관 및 국정원 국장을 통해 육군참모총장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알자회 멤버들의 승진을 돕지 않았냐고 질문했다. 우병우는 물론 부인했다.
우병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권 기간에 알자회가 세력을 키웠다는 이야기가 계속 확산되고 있다. 지난 6월 1일 국회 정책조정회의에서는 홍익표 의원이 "100여 명의 사람들로 이뤄진 군 사조직 알자회가 일부 특정 직위나 자리를 독점했다"고 말했다. 또 알자회 멤버들 역시 독사회 멤버들과 함께 사드 보고누락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독사파를 조직했다는 김관진 전 실장, 알자회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우병우·안봉근 전 비서관은 하나 같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도 모르게 군부 사조직을 관리했을 가능성은 낮다. 만약 그랬다면 '역심'을 품은 것이다. 역심을 품지 않았다면, 대통령과의 교감 하에 사조직을 관리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박 전 대통령이 하나의 사조직에 만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두 부류의 측근들이 알자회와 독사파를 각각 관리했다는 것은, 박근혜가 두 개 이상의 사조직을 동시에 활용할 필요성을 느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단일 계통의 사조직을 운영하려 했다면, 우병우·안봉근보다는 김관진을 통해 단일 계통의 사조직을 운영했을 것이다. 김관진은 육사 출신인데 반해, 우병우·안봉근은 육사 출신이 아니다. 우병우는 서울대 출신이고 안봉근은 대구대 출신이다. 이 두 사람한테 별도의 사조직을 맡긴 것은 박근혜가 여러 사조직의 공존을 원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병우·안봉근은 육사 출신이 아니기에 육군 인사에 직접 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사 출신의 기무사령관 및 국정원 국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개입했다. 번거롭게도 2단계로 군 인사에 개입해서 알자회의 승진을 도운 것이다.
이것은 번거로움을 감내해서라도 2개 이상의 군부 파벌을 공존시키려는 박근혜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김관진의 독사파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어, 일반대 출신을 내세워서라도 둘 이상의 파벌을 유지하려 했던 박근혜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말로는 대동단결 외치는 정치 지도자들, 사실은...
정치 지도자들은 말로는 대동단결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교묘하게 분열을 획책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종족과 종족 간을, 지역과 지역 간을, 농촌과 도시 간을 분열시켜 국민들을 상호 경쟁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려 하는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 분열책을 국민들뿐 아니라 측근들을 상대로도 구사하는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그랬다. 정치학자 전인권은 <박정희 평전>에서 김세진·한용원의 글을 인용해 이승만의 용인술을 이렇게 서술했다.
"이승만은 서로 지역을 달리하는 이들을 이간질시키며 충성을 강요했다. 또한 이승만은 새로운 헌병 기구인 헌병총사령부를 신설하여 이를 국방부 산하에 두었다. ······ 초군적인 헌병총사령부 사령관에 원용덕을 임명하고, 김창룡의 특무부대와 조심스러운 라이벌 관계를 조성시켜 군 사찰 기구가 한 사람에게 독점되는 것을 방지했다."동일한 용인술이 박정희 전 대통령한테서도 발견된다. 5·16 쿠데타를 도운 군인들은 육사 5기와 8기다. 5기는 1947년 10월 입학해서 6개월 뒤에 졸업했다. 8기는 1948년 12월부터 5그룹으로 나누어 입학해서 1948년 5월 최종 졸업했다. 그래서 5기와 8기는 1년 차이밖에 안 난다. 이 두 그룹이 5·16 쿠데타를 성사시켰다. 그래서 두 그룹은 쿠데타 후에 막강해졌다.
군부 내에 막강한 두 그룹이 공존하는 상황은 박정희에게 나쁘지 않았다. 이승만처럼 박정희도 두 그룹의 관계를 이용해 충성 경쟁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기대하기 힘든 사정이 있었다. 5기와 8기의 경쟁이 치열한 정도를 넘어 과열 수준까지 갔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통제하기 힘든 상황까지 갔던 것이다.
5기 출신 쿠데타 주역 중에는 이북 출신 장군이 많고, 8기 출신 주역 중에는 영남 출신 영관급이 많았다. 두 기수의 대립이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KCIA 남산의 부장들>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박정희 소장은 육사 8기생들의 '계획'과 5기생들의 병력 동원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러나 주체세력의 내분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내분은 '남과 북' 그리고 '장군과 영관'들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남 출신 장교와 이북 출신의 밥그릇 자리다툼은 끊임없이 불화를 낳았다."
안 되겠다 싶었던 박정희는 8기를 편들고 5기를 약화시켰다. 8기는 영남 출신인데다가 나이도 젊어서 박정희가 다루기 쉬워서였다. 그런데 8기한테만 군부를 맡길 수는 없었다. 하나의 파벌한테만 맡기는 것은 위험했다. 안 그래도, 5기가 약해지자 8기의 김종필·김형욱·홍종철·길재호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자신이 원하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 다음 단계 작업에 착수했다. 8기와 경쟁할 새로운 파벌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육사 11기 이하 중에서 영남 출신들을 결집시켰다. <KCIA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5·16 쿠데타 주역인 'K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박 의장은 8기 세력이 커지자, 그들보다 더 어려 믿을 만하고 4년제 육사를 마친 영남 출신의 11기 몇 명을 충복처럼 귀여워하게 된 것이다."박정희는 전두환 같은 육사 11기 몇 명을 '충복처럼 귀여워'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1963년부터 육사 11기 이하를 하나회라는 사조직으로 묶었다. 군부 내에서 육사 8기와 육사 11기 이하가 경쟁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자신을 중심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경쟁관계를 토대로 박정희는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자기가 키운 하나회가 자기 사후에 12·12쿠데타를 벌일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박정희의 용인술은 박근혜 정권 하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도 두 개의 파벌이 청와대 참모진과 연계되면서 두 파벌 멤버들이 승승장구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군부 안에 복수의 파벌을 둚으로써 대통령에 대한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던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하니, 박근혜가 권력 유지에 대해서만큼은 그 역시 아버지 못지않은 왕성한 의욕을 갖고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