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전 팔로군총부 기념관(麻田八路军总部纪念馆)을 찾다스먼촌(石門村)에서 마전(麻田)까지는 10여km정도 되었다. 험준한 산세의 태항 산맥 사이를 흐르고 있는 강변을 따라서 도로는 구불구불 이어졌다. 왕복 2차선 도로는 수없이 많은 대형 트럭들이 질주를 하는 중국 산업화 현장의 실핏줄 같았다. 시골지역이라 공기는 깨끗하고 높은 산봉우리들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였다.
한참을 달려서 마전팔로군총부기념관(麻田八路军总部纪念馆)에 도착했다. 마전(麻田)이면 대마를 키우는 밭이라는 뜻인데 과거에는 이 지역에서 대마를 많이 재배했었는가 보다. 험준한 산악 밑에 팔로군총부(麻田八路军总部)가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역사와 애국을 위한 기념관(纪念馆)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마전팔로군총부기념관은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항일운동과 팔로군의 활동을 다양한 자료를 통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당시에 쓰인 무기 등을 비롯하여 항일 운동에 관련된 갖가지 자료들이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중국인들의 항일 활동뿐 아니라 좌권현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항일 활동을 소개하는 벽면도 있었다. 좌권현에서의 외국인 벗들을 소개하는 내용을 번역해 보았다.
"좌권현에는 중국의 항일 전쟁에 참여한 허다한 외국인 벗들이 있었다. 그중에 조선의용군은 가장 특출 나게 돋보였다. 그들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만들었고 팔로군 진열에 가입하였으며 일본군에 완강한 작전을 펼쳤다. 중국내 일본인 반전단체가 있었는데 '일군사병각성연맹본부'와 중국내 '일본공산주의자동맹 태항지부'였다. 각종 반전활동을 하였다. 그들 중 허다한 사람이 중국인의 항일전쟁 중 영용(英勇)한 작전에 함께 했다. 이처럼 자기의 젊은 생명을 바쳐서 중화민족의 해방사업에 헌신하였다. 우리는 영원히 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국인들은 수십 년에 자기들과 함께 싸웠던 외국인을 기억하면서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중국 내에 있던 '일본 공산당원연맹'이나 '일본군 사병각성연맹'도 조직되어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일본인들도 반대한 것은 예상 못한 의외의 일이다. 이래서 역사적인 자료의 보존과 역사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역사적인 현장에 와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일본인들은 침략전쟁에 당연히 반대했을 것이다. 다만 그 숫자가 적고 당시 일본군국주의의 위압에 눌려 대항할 힘이 없을 뿐이었다.
중국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평가에서 조선의용대는 특출하게 돋보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이렇게도 인정하는 데 정작 우리 한국인은 조선의용군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조선의용군을 높이 평가하고 기념하여 후세에 알려야할 것이다.
조선의용군이 부르던 노래를 기억하는 노인들도 있고 조선의용군이 사용했던 건물이나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것이다. 중국 내륙 곳곳에 남아있을 조선의용군의 흔적들을 발굴하고 찾아내서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해야할 것이다. 조선의용군의 유적지들을 찾아내고 추모하는 것은 한중의 공통의 일이기에 사드 문제로 냉랭해진 한중간의 우호증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기념관에 전시된 조선의용군의 사진한쪽 벽면에는 조선의용군을 소개하는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 사진의 내용을 번역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화북지구의 조선인들은 요현(遼縣) 동욕(桐峪)에 모여 살았다. 화북 조선청년연합회는 반전조직이었다. 팔로군 영도를 받아들이고, 팽덕회가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를 하였다. 후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에 온 조선인들은 함께 모여서 산 것을 엿 볼 수 있다. 단순한 생계를 위하여 중국에 온 것이 아니라 조선 청년들은 항일 조직을 만들고 그 항일 조직이 일본과 싸우는 조선의용군으로 편입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용군은 독자적인 조직이지만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쟁에 참여한 것을 볼 수 있다. 팔로군 최고 지도자인 팽덕회가 조선의용군 회의에 참여하고 보고를 한 것을 보면 조선의용군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스스로 일어선 조선의용군또한 1944년 6월 하순 좌권현에서 있는 조선독립동맹 조선사병대표 대회에 참여한 조선의용군들의 사진도 있었다. '사병대표회의'가 있었다는 것은 조선의용군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상명하복의 조직이 아니라 사병들이 주도가 되는 민주적인 군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서 강제적으로 모인 군대가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자기 스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자기들 스스로 조직한 민간의 군대였다.
자발적으로 일어난 군대이었기에 스스로 무기를 보급하고 스스로 농사하고 자력으로 움직이는 군대였으니 그들이 고단함이 느껴졌다. 이들에게 군사학적인 명칭을 붙이면 항일 빨치산(Partizan)이었던 것이다. 빨치산! 이 단어가 빨갱이로 변질되고 빨갱이라면 경악하고 뒤집어지는 한국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처럼 위대한 단어가 또 어디 있는가? 스스로 일어나서 외적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고자 일어난 민간의 자발적 군대가 빨치산이 아닌가? 임진왜란 때에 임금과 관군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했을 때에 백성들 스스로 일어나서 왜병과 싸웠던 의병이 빨치산이요, 나치의 점령에 저항했던 프랑스 민간인 레지탕스도 빨치산이다.
빨갱이라는 변질된 이념의 덧칠이 되지 않았더라면 빨치산은 참으로 좋은 단어였을 것이다. 이제는 동무, 인민, 수령이라는 단어와 함께 금기시 되는 언어가 되었으니 이념으로 편을 갈라서 언어마저 변질시키는 치졸한 싸움이 한심스럽기만 하다. 6.25 이전에는 동무나 인민이라는 단어가 흔히 쓰이는 친숙한 단어였고 수령은 조선시대에 각 고을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는데 지금은 그런 단어를 쓰면 안 되는 꽉 막힌 분단의 절벽 시대를 살고 있다.
사진 속의 조선의용군들은 그런대로 군복을 입고 총도 메었는데 대부분 앳된 청년들이었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분들이 많았고 간혹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분들도 있다.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들이 남긴 조국독립을 위한 헌신과 수고를 누가 알아주고 있는가? 뜻있는 개개인이나 단체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선의용군에 대한 추모와 이들이 남긴 역사적인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고 기려야 할 것이다.
구름도 고개를 숙이는 운두저촌(雲頭底村) 마전의 팔로군 기념관에서 4-5km 정도 떨어진 운두저촌으로 택시는 달렸다. 여행을 계획할 때에 대중교통으로 와서 마전 팔로군 기념관에서 운두저촌까지 걸어서 갈까 했었다. 막상 현장에 와보니 걷기에는 너무 멀고 내리 쪼이는 뜨거운 태양빛에 걸어서 갔으면 중간에 포기했을 것이다.
비용은 좀 들었어도 택시를 대절한 것이 참 잘한 선택이었다고 자족하면서 다리도 건너고 마을들을 지나쳤다. '구름도 머리를 아래로 숙인다'는 운두저촌(雲頭底村)이라는 마을 이름이 말해 주듯이 높은 태항산맥 아래 위치한 마을이었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평지에는 농사할 수 있는 곳으로 주민들이 농사일을 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조선의용군 주둔지는 팔로군 주둔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적인 역할을 했던 듯하다. 조선의용군 주둔지는 문이 잠겨 있었다. 건물은 흙과 벽돌로 되어 있었는데 보수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인 듯하였다. 건물 주변은 풀이 높게 돋아나 있고 대문 앞에서 붉은 꽃이 탐스럽게 피어서 혁명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문에는 붉은 깃발이 대나무에 매여서 휘감겨 있었고 '조선의용군 구지'라고 한문으로 쓰인 현판이 문 위에 걸려 있었다. '현급문물보호단위 1985년8월1일'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봐서 현에서 관리하는 듯했다. 현판 옆에는 또 하나의 현판이 붙어 있었다. '좌권현백처혁명문물기념지'(左權縣百處革命文物紀念地), '운두우 조선의용군화북지대주둔지구지 2014년 5월 좌권현 인민정부 세움(人民政府 立)'
비록 오래된 조선의용군 주둔지이지만 중국의 현급 정부에서 조선의용군의 역사를 잊지 않고 꾸준히 관리를 하는 듯했다. 한국인이 항일을 위해 싸운 주둔지를 중국 정부가 관심을 잃지 않고 기념하고 보존하려는 역사의식을 높게 사주고 싶다.
주둔지 앞에는 커다란 연자 맷돌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흘러내렸다. 여기서 곡식을 찧고 밥해 먹고 훈련을 받았을 조선의용군들의 고단한 삶이 그려졌다.
한국과 중국이 함께 세운 순국선열전적비주둔지 건물 앞쪽 길가에는 한중수교 10주년을 기념하여 2002년에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와 '중국좌권현인민정부'가 함께 세운 '조선의용군 태항산지구항일전 순국선열전적비'가 우람하게 서 있었다. 또한 "조선의용군주둔구지(朝鮮義勇軍駐屯舊地)'라는 한문으로 된 작은 비도 세워져있었다. 한글과 한문으로 함께 새겨진 전적비는 조선의용군의 행적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이곳 운두저촌은 일제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중국군민과 함께 싸운 조선의용군이 1940년대에 주둔했던 항일독립전쟁의 현장이다. 조국광복을 앞당기기 위해 동북지방으로 진출코자 북상하던 조선의용군은 이곳 태항산 지구에서 일본군 주력부대와 접전 중국군민과 함께 반소탕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41년 박철동 이정순 손일봉 최철호, 1942년 석정 윤세주 진광화와 1943년 이원대님을 비롯한 많은 선열들이 이러한 항일독립전쟁에서 순국하였다. 조국광복은 선열들의 이 같은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다. 중국의 좌권 장군이 이 지구에서 전사한 것도 1942년 같은 시기이다. 태항산 항일전 승리 60주년과 한중 수교 10주년에 즈음하여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공훈을 기리고 희생을 되새기기 위해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이 비를 세우는 바다. 2002년 12월 26일"
태항산맥 한 가운데 위치한 운두저촌에 중국과 한국이 함께 세운 항일전적비는 한국과 중국이 함께 역사를 공유하며 두 나라가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듯하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맞서 중국과 한국은 이처럼 힘을 합쳐서 싸웠다.
태항산맥에서 바라본 한반도 정세2017년 현재 한반도는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동북아에서 일방적으로 독주하려는 강경한 미국과 이에 맞서서 핵과 미사일로 타협 없이 대응하려는 북한 때문에 가장 곤란한 나라가 한국과 중국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갈등과 긴장의 완충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한국과 중국이다. 한국은 미국은 물론 중국과도 교류하고 있다. 현재 동북아가 막혀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2곳이다. 하나는 북한과 미국이요, 또 하나는 남한과 북한이다. 이 2곳이 열려서 서로 오고가고 교류한다면 복잡한 동북아 문제는 어쩜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미국과 북한이 수교하고 남한과 북한도 유엔에 가입한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여서 교류할 일이다.
해마다 몇 차례씩 실시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고 미국이 협상의 테이블로 나오면 북한이 대화를 하겠다는데 미국 보수 정권은 북한과 대화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북한은 국가 생존권을 위해 비대칭 군사전략으로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는 듯하다. 한미군사훈련이 실시되면 북한은 미사일 쏘고 핵실험을 하는 등 신경질적인 군사적 대응을 해왔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면 미군은 핵잠수함과 전략 폭격기가 한반도로 날아와서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이 예방 전쟁으로 북한을 먼저 타격하겠다고 소리치면 북한은 미국 핵전략 폭격기의 근거지인 괌과 미국 본토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두 나라가 주거니 받거니 서로 위협하고 싸우는 것이 초등학교 애들의 말싸움처럼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나온다. 그러면서 저러다가 누가 하나라도 오판하여 진짜 전쟁 터지면 어찌하나 불현듯 겁도 난다.
유엔은 북한에 경제 제재를 가하고 북한은 이에 맞서서 더 강경책으로 치닫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비결은 북한과 미국이 대화하고 남한과 북한이 교류하는 일이다. 대화와 교류를 방해하고 싫어하는 세력들은 동북아 긴장을 조성하여 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키고 별별 첨단무기를 팔아먹으려는 악의 세력들이다. 핵과 미사일, 사드와 핵잠수함과 전략 폭격기가 점점 증가하는 위험한 화약고인 한반도 문제를 풀어갈 방법은 대화와 교류의 평화적 방법이어야 한다.
한중이 힘을 합쳐서 일제와 싸웠고 또한 한중수교 10주년을 기념하여 함께 순국선열전적비를 세웠는데 지금은 미국과 북한의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사드문제로 한중관계가 얼어붙고 있다. 조선의용군이라면 현재의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
머나먼 태항산맥 아래 운두저촌에서 바라보는 한반도의 정세는 답답하기만 하다. 운두저촌 아래에는 조선의용군들의 함성과 전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강물은 흐르고 있고 뒤에는 우뚝우뚝 솟아난 태항산맥의 바위들이 굳센 결의로 서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