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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악구 신림6동 빈민 골목에서 박승한 상임이사.
관악구 신림6동 빈민 골목에서 박승한 상임이사. ⓒ 조호진

사단법인 관악사회복지 박승한(58) 상임이사는 성공한 청년사업가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7년가량 샐러리맨 생활을 하던 그는 친구(미디어윌그룹 회장 주원석)의 권유로 1991년 구로와 광명에서 생활정보신문 <벼룩시장>을 창간했습니다.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사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과 필요한 사람 등을 연결해주는 생활정보신문이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급속도로 성장하자 다음해인 1992년엔 관악과 동작지역에도 벼룩시장을 잇달아 창간했습니다.

핸드폰이 없던 당시 생활정보신문은 최고의 정보 상품이었습니다. 중고 물품과 구인구직뿐 아니라 중개료 없이 집을 구하거나 파는 것 등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한 이용자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벼룩시장>은 날로 성장했고 그는 부자가 됐습니다. 연봉 1천만 원 외국계 회사 샐러리맨에서 연 수입 2억 원대의 청년사업가로 성공한 것입니다. 현재 4억대 아파트가 당시에 4천만 원에 거래됐으니 그의 연 수입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억 원 정도로 추산됩니다.

성공한 30대 청년사업가는 골프를 치거나 고급 술집을 드나드는 등 자본주의가 주는 맛을 맘껏 향유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연히 시청한 TV에서 자신의 사업구역인 관악구 봉천동 달동네에서 빈민운동을 하는 젊은 신부에 대한 방송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봉천동 달동네에서 빈민운동을 하는 송경용 성공회 신부가 철거민들인 목수와 미장이 등 소위 노가다들을 조직해 '나래건설'이란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습니다.

그 방송을 보는데 '저 신부는 뭐지? 왜 저렇게 살지? 저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있는데 같은 관악에서 돈을 버는 나는 기껏 골프치고 술 마시면서 흥청망청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느닷없이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성공한 30대 사업가, 빈민운동에 발 담그다

 1995년 주민복지운동을 기치로 내걸고 출발한 관악사회복지 개소식 모습. 사회자 옆이 김혜경(전 민주노동당 대표) 초대 이사장과 왼쪽 두 번째 박승한 상임이사, 바로 옆에 송경용 신부.
1995년 주민복지운동을 기치로 내걸고 출발한 관악사회복지 개소식 모습. 사회자 옆이 김혜경(전 민주노동당 대표) 초대 이사장과 왼쪽 두 번째 박승한 상임이사, 바로 옆에 송경용 신부. ⓒ 관악사회복지

중학생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행상 아주머니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박봉의 교사 월급으로 6남매를 키워야했던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생선 값을 깎으려 했고 아주머니는 못 깎아준다면서 실랑이를 하다 흥정이 깨지고 만 것입니다.

함지박을 이고 돌아서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그는 뒤쫓아 가 자신의 용돈을 드리면서 깎지 않은 가격으로 다시 흥정할 것을 부탁하면서 거래를 성사시켰습니다. 가난한 행상 아주머니 모습이 떠오른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1993년 송경용 신부를 만났습니다.

봉천동 나눔의 집 송경용 신부와 난곡 주민운동가인 김혜경(전 민주노동당 대표) 당시 관악구의회 의원과 조흥식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관악의 많은 활동가들이 가난한 주민을 위한 조직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봉천동과 난곡 등의 달동네가 재개발로 인해 주민공동체 거점이 사라지면서 빈민운동의 새로운 변화가 요구된 가운데 주민복지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비로소 그의 자본이 빛을 발했습니다.

"송 신부가 '사단법인 관악사회복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돈이 있으니 나는 돈을 내겠다. 당신들은 빈민들을 위한 주민복지운동을 하시라'고 하면서 아무 조건 없이 3천만 원(현재 3억 원가량)을 드렸습니다. 자금을 대긴 했지만 빈민운동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착한 자본가 정도는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소박한 꿈은 착한 자본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벼룩시장> 지면에 주민운동을 소개하고, 운영비를 대고, 활동가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빈민운동을 측면 지원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군자금을 모집했습니다. 군자금이 독립운동가 육성과 항일투쟁의 젖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악지역 빈민운동 자금책을 자청한 그는 1995년 창립한 '사단법인 관악사회복지' 초대 이사로 참여했습니다.

군자금 모으러 나서는 독립운동가처럼

 관악구 신림6동에 위치한 '은빛사랑방' 어르신들과 함께 하고 있는 박승한 상임이사.
관악구 신림6동에 위치한 '은빛사랑방' 어르신들과 함께 하고 있는 박승한 상임이사. ⓒ 조호진

1997년 여름이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벼룩시장>을 정리한 그는 믿었던 사업 파트너와 신의로 계약서 없이 투자했다가 큰 실패를 겪게 됩니다. 그의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갈 정도로 막다른 상황이었는데 친구들이 은행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그에겐 세상에서 보기 힘든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묵묵하고 우직한 그의 성품을 친구들이 높이 샀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무료법률가정상담소를 운영하고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2011년부터 관악사회복지 상임이사를 맡았습니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조직을 추스르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는 "50대에 운동을 떠나는 이들을 간혹 보곤 했는데 학생운동을 경험하지 않은 제가 투철한 소명 의식도 없이 50대에 빈민운동가 됐다"면서 쓴 웃음을 짓습니다. 운동을 발판 삼아서 욕망을 채우는 이들 때문에 볼썽사나워진 운동 판에서 그는 거꾸로 50대에 빈민운동가가 된 것입니다.

1970~1990년대엔 그렇지 않았지만 요즘은 빈민운동이 인기가 없습니다. 후원을 많이 받으려면 인기 있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좋은 일을 하는 척 해야 후원금을 넉넉히 걷을 수 있는데 관악사회복지는 그런 수작을 부리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6명의 상임 활동가들은 최저임금조차 제때 받지 못합니다. 7월에는 최저임금의 60%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재정난에 처하면 박승한 상임이사는 군자금을 모으러 나서는 독립운동가처럼 자금을 모집하러 나섭니다.

"저에게 돈은 없지만 좋은 친구들은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친구들을 찾아가 '좋은 일 좀 하라!'고 부탁하면 '너 앞가림이나 하라!'고 퉁을 주면서도 슬그머니 후원금을 줍니다. 빈민운동을 잘 모르지만 마음이 따뜻한 친구들입니다.

많은 친구들이 관악사회복지에 정기 후원회원으로 도움을 주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뭉칫돈으로 어려움을 해결해 주곤 합니다. 인생을 거꾸로 사는 저에게 따뜻한 친구들은 든든한 지원군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복지장사 편승할 생각 없다"

 관악 지역 행사에 참석한 박승한 상임이사가 아기를 안고 있다.
관악 지역 행사에 참석한 박승한 상임이사가 아기를 안고 있다. ⓒ 관악사회

그는 병든 노모(86)를 모시고 삽니다. 말년에 섬에서 교장생활을 하신 딸깍발이 부친은 1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노모는 지난해 대장암 수술을 하셨습니다. 노모가 걱정하실까봐 사업 실패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관악사회복지 사람들도 그의 신상에 대해 잘 모릅니다. 절친한 친구 외에는 어려움을 말하지 않는 성격 탓입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보다 헌신적으로 일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상임 활동가들의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관악사회복지는 주5일 근무제로 6시에 퇴근하게 되어 있지만 정시에 퇴근하는 활동가는 없습니다.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주중에는 밤 10시 혹은 자정까지 활동합니다. 경제적으로 밑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활동가들이 결혼한다고 하면 걱정이 앞섭니다. 혼자 살 때는 그나마 견딜 수 있지만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면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동네 빈민운동에서 주민복지운동으로 전환한 관악사회복지는 지역사회복지론 교재에 등장할 정도로 지역주민운동의 대표적인 단체이지만 지난 22년 동안 재정난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동정심을 유발해야 내는 후원금, 폼 나게 해주어야 생색내며 내는 후원금... 이들은 이런 후원금을 받지 않습니다. 지난 22년 동안 지켜온 주민운동의 순수성을 도매급으로 넘기지 않을 작정입니다.

 박승한 상임이사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주민들과 함께 하는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주민 행사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한 박승한 상임이사.
박승한 상임이사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주민들과 함께 하는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주민 행사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한 박승한 상임이사. ⓒ 관악사회복지

박승한 상임이사는 조직의 약점(운동의 순결성)을 보완할 해결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운영위원회는 그가 사업 수완을 발휘해서 재정난을 타개해줄 것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후원금 모으는 일에 주력하면 소외된 주민들을 사업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진짜 해야 할 주민복지를 소홀히 하게 된다"면서 "관악사회복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재정보다 운동"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는 더 이상 사업가가 아니라 원칙을 지키는 빈민운동가입니다.

"상당수의 복지기관들은 예산과 인력 범위에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일부 부도덕한 기관들은 가난한 사람을 팔아 이익을 챙깁니다. 그건 복지사업이 아니라 복지장사입니다. 관악사회복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가난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고 절망하는 이웃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많은데 어떻게 그들의 피눈물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복지 장사에 편승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길이 힘들지만 가야할 길이고 옳은 길이라고 믿습니다."

쑥고개 사무실 재개발 되면 어디로 갈까?

 재개발 지역인 관악구 쑥고개에 위치한 관악사회복지 사무실.
재개발 지역인 관악구 쑥고개에 위치한 관악사회복지 사무실. ⓒ 조호진

박승한 상임이사는 활동비를 받지 않는 무급 활동가입니다. 그가 사업가 시절에 송경용 신부를 보면서 던진 물음처럼 나는 그에게 "당신은 뭐지? 왜 이렇게 사냐?"고 물었습니다. 그와 동갑인 나는 쪼들리는 생활비에 노심초사하며 사는데 그는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자신보다는 활동가들을 걱정하며 자신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살아가는 활동가들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지만 존경스럽습니다. 자신의 욕망 채우기에 급급한 우리 사회가 망하지 않는 것은 자신보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관악사회복지 활동가들을 이 시대의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헌신만을 강요할 순 없습니다. 이들이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저의 역할입니다."

22년째 빈민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고 있는 관악사회복지 사무실은 재개발 지역인 서울 관악구 쑥고개에 있습니다. 보증금 1천만 원, 월세 35만 원에 사용하고 있는 사무실은 예전에 목욕탕이었다고 합니다. 남루한 지하 사무실이지만 재개발이 되면 큰일입니다. 재개발이 되면 이 돈을 가지고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대책에 대해 물었더니 박승한 상임이사는 대책이 없답니다.

덧붙이는 글 | '관악사회복지' 사무실 마련과 재정난 해소를 위한 '조호진 시인의 활빈(活貧) 프로젝트'에 참여하실 분들은 '관악사회복지' 홈페이지(www.kasw21.or.kr)를 방문하시거나 전화(02-872-8531/070-7568-8531)로 문의해주십시오. 여러분의 소중한 참여와 후원을 기다립니다.



#관악사회복지#박승한 상임이사#빈민운동가#벼룩시장#송경용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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