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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 ⓒ 이희훈

여기, 인권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인권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의 삶은 험난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암과 투병하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기도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오마이뉴스>는 인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 ⓒ 이희훈

스물일곱 개의 눈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서로의 소리를 듣는다. 눈은 다시 지휘자의 손을 쫓는다. 위 아래로 움직이는 손을 보며 목소리도 따라 움직인다. 높은 소리의 테너와 낮은 소리의 베이스는 곡에 따라 한 발자국 앞서기도 하고 뒷줄로 물러나기도 한다. 곡에 맞춰 목소리들이 이동한다. 열세 곡의 노래가 바뀔 때마다 사람들의 목소리, 표정, 손짓이 조금씩 달라진다. 30도 이상의 무더위가 한창인 지난 6일 오후, 서울청소년수련관에 "어머, 나 목소리가 좀 안 나오네" 하는 긴장감과 "귀여운 순서대로 서는 거야?"라는 농담이 흘러나왔다.

노래의 주제는 다양하다. 애태우며 속을 끓이게 하는 사랑,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 유쾌하고 행복하게 함께 하자는 약속까지. 피자로 배를 채우고 물로 목을 축이며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강행군이 이어진다. 오는 9월 10일 정기 공연을 앞둔 지보이스(G_Voice)의 연습현장이다.  

"넘어지면 말해. 나도 따라 넘어질게. 대신 니가 먼저 일어나서 날 일으켜줘.
싸워야 할 때는 내가 맨 앞에 서 줄게. 대신 달아나진 말기 바래. 함께 맞서요." <아름다운 사람들> 중에서

테너1을 맡은 이종걸씨가 목소리를 더했다. 종걸씨는 2003년 지보이스가 창단했을 때부터 함께 활동했다. 지보이스 단원이 돼 무대에 오른다는 건 사회적으로 커밍아웃(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밝히는 일)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이 지보이스 단원들과 함께 합창 연습을 하고 있다. 이씨는 테너를 맞고 있다.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이 지보이스 단원들과 함께 합창 연습을 하고 있다. 이씨는 테너를 맞고 있다. ⓒ 이희훈

지보이스(G_Voice), 국내 유일의 '게이 코러스'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소모임으로 2003년 창단됐다. 지보이스는 능숙하거나 매끄러운 노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게 아니다. 게이(남성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 당당하며 그 목소리를 낼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삶을 드러내며 존재를 노래하는 게이 코러스인 셈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인권활동가부터 대학원생, 의사, 취업준비생까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다양하듯 지보이스의 구성원 역시 다채롭다.

종걸씨의 일요일 일정 대부분은 지보이스 연습이다. 노래하는 걸 워낙 좋아해 망설임 없이 가입했다. 게다가 지보이스는 게이라는 나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됐다. 활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아서 입조심 말조심... 왜?

종걸씨는 진즉 알았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사람도 있지만, 그는 좀 빨랐다. 여섯 살 터울의 누나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누나가 보는 미국영화를 따라 봤다. 자꾸 눈길이 가고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남자배우 둘이 서로에게 호감을 품는 장면이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에 비슷한 사진이 실린 잡지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안 보일 때, 슬쩍 잡지를 들췄다. 자꾸 눈이 갔다. 어린 마음에 '내가 왜 자꾸 이 생각을 할까' 고민도 했다. 게이가 뭔지 동성애가 무엇인지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나는 이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본능적인 거였다.

"저는 어렸을 때 제 성향을 알았으니까 사실 어린 마음에 뭐가 좋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싫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좋은 걸 좋다고 하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아무도 말하면 안 된다고 입조심 하라고 한 적도 없는데, 알아서 그랬다. 미션스쿨이었던 학교에서는 동성애가 위험하고 불결하다는 식으로 가르쳤다. 가족 중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매주 일요일 혼자 찾아가던 교회가 멀게 느껴졌다. 찬양을 좋아하며 성가대 활동을 했던 중학생 종걸은 하나님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조용히 티 나지 않게. 중·고등학교 내내 신경 쓰며 살았다. 손짓 하나라도 남성답지 못할까 봐, 조금이라도 동성을 좋아하는 게 드러날까 조심했다. 종걸씨가 나고 자란 지역에 동성애자는 종걸씨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채 꼭꼭 숨겼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서울에 올라갈 때까지 참자', 그 생각 하나로 버텼다.

대학교 2학년, 군대를 제대하고 잠깐 고향에서 지냈다.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 친구도 동성애자였다. 동성애자는 그 혼자가 아니었다. 어디나 언제나 존재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때는 몰랐다.

똥물 퍼부으며 "이 결혼 반대"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 ⓒ 이희훈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귀했다. 연인이 아니어도 서로를 지지하고 사랑하며 서로의 기둥이 되어주는 존재. 지보이스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그랬다. 지보이스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친구사이 활동으로 보폭을 넓혔다. 종걸씨는 친구사이 총무를 하다 대표를 거쳐 다시 총무로 일하고 있다. 인권활동가라는 수식을 달고 산 지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게이가 나쁘고 더러운 게 아니라고, 누군가 반대하고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여전히 누군가는 끊임없이 종걸씨와 친구들을 부정한다. 영화감독인 김조광수씨와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의 결혼식이었다. 서울광장 앞에서 공식적으로 '우리 결혼합니다'를 선보인 결혼식. 한국 최초의 성소수자 공개 결혼식이었다. 법은 이들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결혼식이기도 했다.

종걸씨와 지보이스는 축하 무대에 올랐다. 사회자가 지보이스를 소개했다. 누군가 다가왔다. 무언가를 들이부었다. 똥물이었다.

50대 한 교회 장로는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다며 똥물을 뿌렸지만, 지보이스 단원 중 무대를 내려간 사람은 없었다. 얼굴과 등에 흰 셔츠와 검은 바지에 조금씩 똥물을 뒤집어쓴 채로 축하무대를 마쳤다. 무대에 내려와서야 똥물을 닦았다. 누군가는 눈물도 함께 닦았다. 종걸씨는 화가 났다.

"사실 그런 사람들 싫어하고 미워하기도 지쳐요. 그냥 안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념으로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혐오하는 거예요. 그 앞에서 욕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그래도 우리는 꿋꿋하게 버텨야 한다며 있는 거죠. 괜찮을 수 없죠."

서울의 한복판에서 사랑을 맹세한다는 이유만으로 똥물을 뒤집어쓰는 게 성소수자의 현실이다. 사실 인권은 대단한 게 아니다. 사람으로의 존중. 사람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 뻔하고 당연한 말인데 누군가는 종걸씨를 향해 '너는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고 외친다. 성소수자를 향한 빨간 딱지를 붙여놓고 난도질한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지키는 게 중요했다. 목숨을 지키고 자존을 지키는 일. 친구 사이가 성소수자자살예방 프로젝트 '마음연결'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 18세 이하인 성소수자 청소년 가운데 53.3%는 자해를 했고, 45.7%는 자살을 시도했다. 시도에서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친구사이는 서로에게 비비며 상담할 수 있도록 온라인과 오프라인 장을 마련했다. 마음의 삐걱거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24시간 들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커밍아웃 역시 친구사이의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커밍아웃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커밍아웃했을 때 생기는 긍정적 의미, 즉 자신이 자신이 되는 것만으로 갖는 기쁨과 안도, 자연스러움을 설명한다. 동시에 여전히 사회의 낯선 존재로 있는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내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한 이야기까지 전한다.

가장 가깝지만 먼 관계가 될 수 있는 가족에 대한 고려도 있다. '성소수자 가족모임'이다. 내 자식이 동성애자인 것이 부모에게 어떤 의미와 이해 혹은 오해가 될 수 있는지 정기적으로 모여 이야기한다.

"'그런 일' 계속해야 하니?"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 건 알고 있지만 상처가 되더라고요. 우리나라가 동성애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걸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 건 알고 있지만 상처가 되더라고요. 우리나라가 동성애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걸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요?" ⓒ 이희훈

종걸씨 역시 가족에게 커밍아웃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형과 누나는 종걸씨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부모님은 아니다. 6년간 함께 살던 형이 어느 날 물었다. "너도 게이니?" "응" 짧고 간단하게 답했다.

"그건 그런데 꼭 일까지 그런 일을 해야겠니?"

'그런 일'이란 친구사이 일을 뜻했다. 퀴어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성소수자자살유가족을 위한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웹툰 혹은 영화를 통해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노래하며 게이의 삶을 담아내는 것들. 최저임금을 받으며, 어떤 때에는 주 5일 이상을 일하고 삶과 일이 뒤섞여 있는 날들. 나의 삶뿐만 아니라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일들. 쌍용차 해고자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연대하고 팽목항을 찾아 세월호 유가족에게 힘을 보태며,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과 성소수자의 차별 없는 세상이 연대하도록 마음을 더하는 일들.

누나는 형을 통해 종걸씨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형과 누나는 종걸씨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한국은 동성애자가 살기 어려워 보이는데, 외국은 어떠냐"고 권했다. 남동생이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미였겠지만, 그에게는 상처였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 건 알고 있지만 상처가 되더라고요. 우리나라가 동성애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걸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종걸씨의 부모님은 질문이 많아졌다. 40대를 앞둔 그에게 "이렇게 혼자 살아도 괜찮겠니?", "제대로 밥벌이를 해야 하지 않겠니?"를 자주 묻는다. 서울에서 혼자 사는 막내아들의 삶을 부모님은 잘 알지 못한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에 숨기지 않으며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아직 설명한 적 없다.

"집에서는 혼자 지내며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아들이 외롭게 보이고 걱정되나 봐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말해야 할 때가 됐나 싶어요. 이번 추석 연휴가 긴데 그 때 말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스스로를 숨기지 않는 데 그만의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다.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종걸씨는 나를 숨기지 않고 나를 숨길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갔다. 친밀한 타인 같은 부모님이 남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종걸씨의 존재와 종걸씨가 해나가는 일들. 성소수자가 어떤 수식도 없이 살아낼 수 있는 사회. 그게 결국 종걸씨 스스로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고 부모님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오마이뉴스 '인권 이즈 커밍' 공동기획팀
신나리·신지수·선대식(글), 이희훈(사진), 최유진(편집)



#인권 이즈 커밍#이종걸#박래군#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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