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빼앗긴 나라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자로 태어난 것일 뿐이리.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일본군 '위안부'로 살았던 이옥선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그림으로 만났다.
김금숙 작가의 신작 만화 <풀>이 세계 '위안부'의 날을 기리며 8월 14일에 보리출판사의 평화발자국 시리즈 19번째로 발행되었다. 부제인 "살아있는 역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증언"이 말해주듯이, 작가가 직접 피해자와 인터뷰 한 내용을 토대로 했다.
여기에 현지답사, 참고문헌 등을 통해 얻은 정보를 더하고, 작가적 상상력을 양념으로 맛깔나게 버무렸다. 그래서 부록을 제외한 본문만도 무려 477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또한 양장본으로 제본하여 작품의 질만큼 소장성도 갖추었다.
'팩트'를 토대로 한 흔적은 작품의 도입부부터 드러난다. 1996년 중국 용정에서 이옥선 할머니가 고향으로 가게 되는 상황의 경우, 1997년 1월 4일 SBS 방송의 "추적! 사건과 사람들: 중국에 남아있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향 찾기"로 할머니가 55년만인 1996년에 한국에 왔음을 알린다. 그리고 작품 중간 중간에 작가로 묘사된 여성(작가의 유명 캐릭터인 '꼬깽이'가 성인인 된 모습일 듯한)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경기도 나눔의 집에서 주인공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대화는 '이게 실화'라는 점을 알림과 동시에, 고단한 삶에도 웃음을 간직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작가가 마지막에 전하는 메시지를 지원하는 역할도 한다. 또한 '학교를 갈 수 있다'는 말에 수양딸로 갔다가 '위안부'가 되고, 그 다음에도 가장으로 험난하게 살면서도 꿋꿋하게 생을 포기하지 않았던 할머니가 가진 긍정의 힘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위안부'를 다룬 기존 작품들과 달리, '사건'만이 아닌 '피해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책이다. 그리고 당시의 충격적 사건으로 피해자가 겪는 아픔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한 인간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달라지는 모습까지 제시함으로써 사건의 심각성을 극대화시킨다.
그녀는 '위안부' 시절 걸렸던 매독 치료를 위해 쓴 수은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해방 후 '위안부' 시절 빵과 달걀을 건넨 심영섭과 어렵사리 만나 결혼하지만, 그는 혼례를 치른 며칠 후 부모와 형제를 그녀에게 떠넘기고 떠났다. 그리고 몰래 새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았다. 훗날 시댁의 권유로 두 남매를 둔 홀아비와 어쩔 수 없이 결혼해야 했고. '위안부'로 끌려만 가지 않았더라도, 인생이 전혀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여기에 "두 남자는 날 트럭에 실었어. 내 또래 여자아이들이..."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대화체를 구사하여 독자는 '남의 일'같지 않게 여겨진다. 또한 주인공 옥선의 어린 시절을 다룰 때 배경인 부산을 고려하여 "옥선이, 이 가시나야, 단디해라, 쫌", "어무이, 나도 핵교 보내 주이소"처럼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여 실감나게 한다.
이는 작가의 전작인 <지슬>과는 다른 점이다. <지슬>은 제3인칭 관찰자 시점인데, 배경이 제주도 시골임에도 등장인물들이 모두 표준어를 구사한다. 단지 중요한 소재인 '감자'만은 '지슬'이라는 현지어로 표현된다. 아마도 미디어를 통해 흔하게 접하여 친숙한 경상도 사투리와 달리, 제주도의 경우 자칫 외국어로 들릴 만큼 이질적이어서 독자의 가독성을 배려한 작가의 의도로 추측된다.
교양만화라 하지만 청소년도 두루 볼 수 있는 것이니, 혹시나 무거운 내용을 가볍게 다룬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마지막 장까지 볼 장 다본 기자는 "돈 워리"라 대답하겠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와 최근 히트작인 <택시 운전사>를 떠올리면 된다. 두 작품은 각각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시민에 대한 국가 폭력이란 심각한 문제를 다루었음에도, 표현에서 폭력성의 수위를 잘 조절하여 전체관람가로 누구나 당시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성폭력을 문 앞에 놓인 일본군의 군화로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하얀 얼굴에 눈, 코, 입 등이 표현된 피해자와 달리, 가해자인 일본군은 검은색 얼굴에 눈과 이빨만 하얗게 표현하여 음흉한 '야수'적 이미지로 인식된다.
그 폭력에 짓밟힌 여성은 목판화가 연상되는 거친 붓질로 나타내어서, 고통당하는 그녀의 육신과 정신을 여실하게 드러냈다. 특히 출산과 동시에 아이를 빼앗긴, 미자 언니의 충격은 뭉크의 <절규> 속 주인공보다 더 극한으로 묘사되었다. 참고로 본문의 10장 <미자 언니>는 단편으로 제14회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한편, <지슬>의 경우 같은 흑백임에도 '목판화'가 아닌 '수묵화' 기법을 사용했다. 시신의 표현을 엄마 옆에서 우는 갓난아기의 울음만 대사 처리를 하여 절제미를 발휘한 경우도 있지만, 집단살육의 현장은 뒤엉킨 시신들과 피로 짐작되는 검은 얼룩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가해자인 군인들은 검은색 실루엣에 총과 칼을 든 모습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성폭행까지 일삼는 윗선의 경우는 얼굴을 눈, 코, 입을 가졌지만 탐욕스럽고 흉악한 모습의 캐릭터로 묘사했다. 참고로 작가가 어린이들 대상으로 만든 '꼬깽이와 떠나는 고전여행'의 경우는 채색 수묵화로 판소리 특유의 해학미를 가미하여 슬픈 장면도 '웃픈' 모습으로 표현했다.
끝으로 작가는 제목을 하필 '풀'이라 했을까? 오히려 희망을 표현할 것이면 '나비'라 하는 것이 더 나았을 성싶은데... 흉한 허물에 번데기로 살았다가 결말은 훨훨 아름다운 날개를 뽐내는 나비.
이는 '민초(民草)'라는 기존의 표현도 있지만 서러운 시대환경에 태어난 여성의 강렬한 '생에 대한 의지'를 더 드러내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이미 언급했듯이 할머니의 삶은 '위안부'가 아니던 시절 이후에도 여전히 고달프기도 했고.
김수영 시인은 오래 전 1968년에 발표한 시 <풀>에서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라며 억압받은 시민을 '풀'로 비유했다. 그런데 당시 정치적 상황 탓인지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라 말하며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반복되는 고난이라는 비장미로 마무리를 했다.
하지만 작가는 훗날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평화의 소녀상 등을 통해 희망의 불씨를 보았기에 '봄'을 기대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말미에 지금 겨울이지만 봄이 올 것이며, "바람에 스러지고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이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