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한국전력이 고리원전 송전선로와 맞닿은 곳에 사는 주민들의 불안감을 덜어주겠다며 설치한 전자파계측기가 고장 상태에서 운영되어 온 것으로 확인됐다. 주민들에게 홍보한 전자파 수치가 실제와 달랐지만, 한전은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해당 장비를 운용 중이다.

문제의 계측기가 설치된 곳은 부산 기장군 정관신도시. 인구 8만 명이 거주하는 정관신도시는 평균연령이 32.9세에 달하고, 신생아 출생률이 전국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젊은 도시이다.

전국 최대 규모의 핵발전 단지인 고리원전과는 직선거리로 10km 떨어진 정관신도시를 둘러싸고 765kV, 345kV, 154kV 등 모두 3개의 고압 송전선로가 지난다. 불안감을 느낀 주민들의 요청으로 한전이 전자파 측정을 위해 모두 3개의 전자계계측기를 설치한 건 지난 2015년 10월께였다.

한전은 이 계측기로 측정한 값을 기초로 주민들에게 전자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그동안 홍보해왔다. 신도시 중간마다 있는 계측기에서는 실시간 계측이라며 해당 수치는 문제가 없다는 글자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지난 18일 찾은 전자계계측기가 표기한 측정치는 1.4 μT(마이크로 테슬라)였다. 20일 다시 찾은 계측기의 측정값도 1.4 μT였다. 3개의 측정기가 200~300m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있었지만 마치 정해진 듯 측정값은 1.4 μT였다.

매일 같은 측정값에 주민 의문  제기하자 그제야 "고장"

큰사진보기

한전은 해당 수치가 전자파 노출 기준인 83.3μT에 미치지 못한다며 문제가 없다고 홍보하고 있었다. 국내 기준보다는 낮지만 스웨덴 (0.2μT), 네덜란드 (0.4μT), 스위스 (1.0μT) 기준보다는 높다.  

정관신도시에 사는 주민은 이미 몇 달째 계측기서 1.4 μT라는 측정치만 흘러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상함을 느낀 한 주민이 한전에 정보공개를 청구하자 한전은 지난 14일이 돼서야 "정관에 설치된 3기의 실시간 전자계 표시장치는 고장으로 판단되며 차후 수리 예정"이라고 알려왔다.

한전은 해당 계측기들이 언제부터 고장이 난 상태였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전은 적어도 6개월 전 해당 계측기의 이상을 알아차릴 기회가 있었다.

전자파와 관련한 민원을 접수한 한전이 공개한 올해 2월 24일 측정값은 온종일 1.4 μT로 기록되어있었다. 미세하게 반응하는 전자계의 특성을 볼 때 분명 측정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한전 관리 소홀 인정...주민 "고장 기계로 전자파 이상없다? 어떻게 믿나"

한전은 제대로 된 정비가 없었음을 시인했다. 한전 동부산지사 관계자는 21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계측기) 화면이 나오는 걸 보고 정상 상태로 생각해 정확히 파악이 안 됐다"면서 "(관리가) 소홀했던 거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전은 계측기 고장 사실을 알아차린 뒤에도 해당 장비를 운영하고 있다. 정관신도시 주민 A(49)씨는 "고장 난 기계로 잰 측정값을 근거로 주민들에게 전자파 걱정이 없다고 말하는 걸 어떻게 믿느냐"면서 "심지어 고장이란 걸 알고도 버젓이 장비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장하나 환경운동연합 권력감시팀장은 "환경부는 일상 생활에서 전자파를 멀리하라는 데, 산업부는 기준치만 넘지 않으면 괜찮다는 일이 한 정부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면서 "전력 당국은 전자파와 관련한 민원을 괴담 정도로 치부하지만 국민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게 과연 어느 쪽인지 살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