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밖의 풍경을 스케치한다. 전망이 트인 곳에서 보이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평선이라 일컫는다. 차창을 통해 하늘과 땅의 경계 지점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경계를 따라 보이는 풍경이 끝이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어김없이 나타나는 조형물이 있다. 처음에는 이 조형물을 진짜 '검은 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밖에 펼쳐진 풍경과 어우러져 나타내는 소의 형상이 조금씩 달랐다. 앉아 있는 모습, 서 있는 모습, 마치 어미와 새끼처럼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가 함께 나란히 있는 모습도 보였다.
투우 그리고 플라멩고풍경을 마음에 담는 것은 여행하며 느끼는 익숙함이다. 비행기에서 보이는 풍경이 하늘과 간간이 보이는 햇살과 구름이라면 기차, 버스, 배를 탔을 때의 경치는 아주 다채롭다.
세비야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중이다. 버스로 이동 중이다. 이 시간이 너무 좋다. 혼자 버스를 타고 가는 느낌이다. 이 고요와 차분함을 마음에 담고 싶어서 차창 밖에 눈길을 둔 지 꽤 오래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상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방문객> 중 한 문단이 생각났다. 그리곤 조용히 그의 제목을 자신의 언어로 바꿔본다. "여행자"로. 어디를 가든 여행자는 자신에게 잠재한 모든 것을 따라가며 여행지의 모든 풍경을 가슴으로 마음으로 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담아온 모든 것이 자신으로 체화되어 힐링과 위안을 얻고 또다시 다른 여행지로 발길은 내딛는다.
검은 소의 형상들이 계속해서 눈앞으로 다가왔다. 목적지를 향해가는 가는 만큼 다가왔던 형상이 뒤로 멀어지며 남아있는 검은 소의 조형들이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너무 아팠다. 자신의 내면에서 투우장에 한 마리의 소로 빙의된 조형물이 울었다. 소리가 너무나도 처연했다.
같은 종족인 소들끼리의 싸움도 힘이 들고 처절하다. 소싸움을 상상하는 것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하물며 소를 다룰 줄 아는 숙달된 한 인간인 투우사와 소와의 싸움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될 것이다. 그래, 투우는 더욱 처절하고 잔인하다. 투우(Bull Fighting)는 사람이 사나운 소를 상대로 싸우는 투기이며, 반드시 어느 한쪽이 쓰러져야만 끝나는 경기이다.
멋진 턱수염을 한 인상 좋은 한 남자가 있다. 눈은 깊고 고요하고 어질다. 그의 모습을 통해 그가 느끼는 세상은 어떤 것에도 절망이란 없을 것 같다. 그는 기자로서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고 그 유명한 '하드보일드(Hard-Boiled) 문체'를 남겼다. 그는 자신이 정형화한 하드보일드 문체로 글을 쓰며, 그의 모든 문학 작품에서 그가 나타내는 모든 생각을 수면 아래로 감추며 독자 스스로 간파하게 만든다.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고 헤밍웨이는 말한다.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는 1920년대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 작가로서 그가 느낀 상실과 허무를 가장 잘 대변한다. 남자의 상실, 성불구는 주인공 제이크로 하여금 사랑하는 애인 브렛을 포기하게 한다. 브렛을 잃었다는 것은 아니, 보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상실이 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상황이 된다.
제이크에게 남성성의 상실을 가장 잘 확인시켜 준 것은 어린 투우사 '로메오'의 투우장면으로 대변되는 남성성이다. 투우장면으로 제이크는 브렛과 로메오의 관계를 확인하게 된다. 갈등의 최고점은 투우를 기점으로 폭발한다. 제이크가 무엇보다 가장 잘 자신의 불능과 마주하게 하는 세밀한 투우장면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슬픔과 비애를 표현한다.
헤밍웨이는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를 "The sun also rises, and the Sun goes down, and hastes to the place Where he arose..."(해는 또 다시 떠오르고 또 다시 지며 원래 떠올랐던 곳으로 서둘러 되돌아간다. Ecclesiastes I.5)라는 성경 구절에서 빌려 왔다. 그가 느끼는 거대한 상실감을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는 새로운 희망의 무지개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느낀 허무와 상실은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보아도 도저히 해갈되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다.
먹먹함을 안고 꼬르도바에 발길을 멈춘다. 스페인의 대표적 시인인 가르시아 로르카가 <기사의 연가>에서 '멀어지는 고독의 꼬르도바여!'를 표현했던 꼬르도바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특이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이곳은 이슬람의 잔재가 남아있는 중세 유럽의 최고의 도시다. 꼬르도바는 '조용한 꼬르도바'란 관광명소답게 은은하며 귀품이 있고 귀족적이다.
꼬르도바 유대인 거리에 이르렀다. 유대인 거리에서 다시 소의 형상과 마주친다. 기념품점이 줄을 지어있다. 한 집에 들어섰다. 소의 형상이 그려진 티셔츠를 한 장 샀다. 상표가 'SOLO'이다. 'SOLO' 단어의 뜻을 찾아본다. 유일한 하나. 같이 검색되어 나온 단어가 'SOLAR'다. 나름 해석을 해본다. '태양을 향하여 홀로 선 유일한 하나' 자신의 해석에 미소를 짓는다. 손으로 소의 문양을 더듬어본다. 가슴에 확 서늘함이 차오른다.
저녁 7시에 공연하는 플라멩고를 보기 위해 서둘렀다. 스페인의 민속무용 플라멩고는 안달루시아 지방 토착 예능과 중세 이후 건너온 집시의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어떤 의미를 표현하는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공감이란 감정이 있기에 마음의 눈으로 한 편의 공연을 본다. 공연은 늦은 시간에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입장 시간보다 좀 늦었다. 서둘러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입장료에 음료수 한 잔의 값이 포함되어 있다.
중년의 남자가 기타를 연주한다. 기타 연주에 따라 멋진 한 청년이 탭댄스를 춘다. 노래를 부르고 그 음악은 너무나도 애잔해 가슴이 시려 온다. 한 컷 한 컷 사진을 찍는다. 그저 마음으로 공감하면서...
삶, 시간, 날을 지나며 생각이 자꾸 변한다. 그럼에도 초지일관으로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처음과 끝을 한결같은 하나의 모습으로, 생각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플라멩고를 추는 연주하는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정확히 가늠키 어렵다. 그럼에도 알게 되는 것은 마음, 사랑, 노력이 삶의 중심이라는 중요한 생각에 이른다.
가는 길이 꽤 멀다. 한 나라의 문화, 사상을 담아내는 여정이 너무 멀다. 그러기에 더욱 남아 있는 나날들, 모든 순간, 시간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올곧게 조우하며 삶을 지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함께 이야기의 여정을 가는 모든 분들에게. 제 글을 기다리고 있다는 한 마디가 힘을 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