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저는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1975년 8월 17일,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그해 들어 가장 무더운 하루였다고 합니다. 그런 일요일 오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한 남자가 숨진 채 발견됩니다.
그의 이름은 장준하. 1918년생으로 2018년이 되는 내년이면 태어난 지 100년을 맞이하는 그의 삶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일생이었습니다. 1944년 일본군으로 징병된 그는 부대를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됩니다. 이후 조국이 해방되자 장준하는 백범 김구의 비서 신분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합니다.
이어 월간 <사상계>의 사장으로,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이후에는 재야의 지도자로서 박정희 유신 독재에 맞서 누구보다 강고한 투쟁을 했던 민주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실족사로 최후를 맞이한 것이 지금으로 만 42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오늘까지도 '묻어지지 않은' 의혹으로 남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 중 하나로 늘 언급되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혹 중심에는 장준하 선생의 최후를 목격했다고 주장해온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장준하 선생의 최후를 봤다고 그간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일관되게 했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느 때는 실족사, 또 어느 때는 그런 장면을 자기는 보지 못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한 것입니다.
바로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 중 김용환씨의 진술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진실이 무엇인지 이 사건 담당 조사관이었던 저는 미치도록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증거 자료가 있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4일이 지나가던 1975년 8월 20일, 그러니까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5일장이 치러졌을 때 발인 전날 밤, 상가를 찾아와 조문한 김용환씨의 육성 녹음 테이프였습니다.
당시 상가에는 문익환 목사님을 비롯하여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 선생님 등 다수가 김용환씨의 최후 목격을 듣고 있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최후를 목격했다는 김용환씨의 말이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문익환 목사님이 매우 중요한 비밀 작업을 했습니다. 바로 김용환씨 몰래 그 진술 내용을 1시간 9분간 카세트로 녹음한 것입니다.
저는 이 녹음 테이프에 담긴 그의 육성이 무엇인지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 담당 조사관이 된 후 제일 먼저 찾아 나선 것이 문제의 녹음 테이프 행방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녹음 테이프의 행방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찾지 못할까 낙담하던 그때였습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마침내 녹음 테이프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 때의 기쁨, 정말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의문사 의혹을 풀 결정적 열쇠를 찾다하지만 고민의 끝은 거기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확보된 녹음테이프의 상태가 걱정된 것입니다. 테이프가 녹음된 때는 1975년, 그리고 제가 이 테이프를 찾은 때가 2004년이었으니 최소한 29년이 지난 이 테이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우려된 것입니다. 혹여 재생시키다가 테이프가 훼손되면 그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협조였습니다. 녹음 테이프 상태 및 음질을 보정하여 보다 선명하고 깨끗하게 복원시켜달라는 의뢰였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국과수의 답변은 비관적이었습니다. 방치된 시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녹음 당시 여건이 좋지 않아 잡음만 가득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결국 국과수는 이 테이프에 대한 음질 보정을 포기하고 맙니다. 누구보다 녹음 테이프 안에 담긴 내용이 필요했던 저로서는 그야말로 절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절망스러워 하는 저를 보더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까요. 국과수 직원이 던진 한마디 말입니다.
"음질 보정의 경우 국과수보다는 민간에서 쓰는 기술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국과수 보유 기자재보다 노래를 더빙하는 민간 녹음실 장비가 더 좋다"며 "그쪽에서 다시한번 음질 보정을 시도해 보라"는 조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또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알게된 분이 있었습니다. 경기도에 위치한 작은 시골 동네에서 녹음실을 운영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꼬박 3일간 밤낮 없는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원래 국가 예산으로 지급하는 수고료가 터무니없이 적은데 그러한 액수로 이런 고된 작업을 부탁한 것이 너무도 미안할 지경이었습니다. 더구나 마감 시간은 다급하게 정해 놓고 할 일은 많으니 무슨 말로 그 미안함을 표할까요.
그래서 마지막 삼일 째 밤이었습니다. 고생하시는데 너무 적은 수고료를 드려 송구하다는 말을 거듭하니 그때 돌아온 녹음실 사장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이 일이 의문사와 관련한 업무가 아니었다면 절대 그 비용으로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 마음 씀씀이에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이후 듣게된 사장님의 이야기를 저는 오늘까지 단 한번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이 일을 진짜로 도와주고 싶었던 속내의 고백이었습니다.
"조사관님, 가수 김광석 아시죠?""조사관님. 사실은 저도 꼭 밝히고 싶은 의문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일을 제가 맡겠다고 한 것인데, 대신 이 일이 끝나면 저도 조사관님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네? 그 부탁이 뭔데요?"그러자 녹음실 사장님은 지금까지 작업을 하던 오디오 믹싱기를 매만지며 "조사관님. 지금 장준하 선생님의 녹음 테이프를 보정하고 있는 이 오디오 믹싱기가 누구 것인지 아세요?"라는 뜻밖의 질문이 아닌가요.
저는 뜻밖의 질문에 적이 당황하며 "누구 건데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듣게된 말.
"조사관님. 가수 김광석씨 아시죠? 지난 1996년 1월 6일에 자살했다고 알려진 바로 그 가수."그야말로 '소름이 쫙 돋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밤 12시가 넘는 한적한 시골 마을의 외진 녹음실에서 생각지도 않게 마주한 가수 김광석의 유품. 그런데 왜 그런 귀한 유품이 여기에 있는 걸까요?
"사실 저는 광석이 형과 생전에 음반 작업을 같이 한 동료였어요. 그런데 새 음반을 준비하며 활기에 차 있던 그 형이 어느 날 갑자기 자살했다는 거예요.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만큼 저 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은 바로 그때였어요.""이상한 일? 그게 뭔데요?"마른 입을 다시며 저는 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어지는 말.
"광석이 형의 사인이 자살로 처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인데요. 깜짝 놀랄 소식이 전해진 거예요. 글쎄, 광석이 형이 생전에 쓰던 모든 악기와 음향기기 등을 그 부인이 아주 헐값에 전부 내놨다는 거예요. 형이 쓰던 것 중에는 상당히 귀한 것도 많고 또 그 자체로도 보존의 의미가 있는데 그야말로 떨이 식으로 전부 다 내 놓은거죠. 그래서 그때 제가 가지고 있는 현금을 다 털어서 산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음질 보정하고 있는 이 오디오 믹싱기입니다."그러면서 이어진 사장님의 말씀.
"그래서 조사관님. 부탁이 있습니다."
"네? 뭐죠?"
"다름이 아니라 지금하고 계신 장준하 선생님 의문사 사건 조사가 끝나면 제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의문사에 대해 조사해 주실 수 있나요?"
"그게 누구?"
"바로 가수 김광석 형의 죽음에 대한 의문 말입니다. 이 죽음에 대해 반드시 진실을 밝혀 주세요. 형은 절대 그렇게 자살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 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요. 형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부탁입니다. 형이 왜 죽었는지 그 진실을 밝혀 주세요."
영화 <김광석>, 의문사 의혹의 첫 문을 열다
오는 8월 30일 개봉하는 영화 <김광석>이 바로 그 '의문사의 첫 문'을 열고 있습니다. 지난 8월 16일 영화 시사회를 통해 제가 본 영화 <김광석>은 그 의혹의 첫 문으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영화 <김광석>이 끝난 후 출입문을 나서며 속삭였습니다. "시작은 음악 다큐였으나 후반부로 가면서 스릴러로 바뀐다"는 평가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996년 이후 만 21년 동안 우리 사회 일각에서 끊임없이 속삭여진 가수 김광석의 진짜 사인이 무엇인지 이제는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 말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영화 <김광석>에서 한 인물에게 집중되는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원권'입니다. 신원권은 '억울한 일을 당한 채 사망한 사람을 대신해 그의 가족들이 진상을 밝혀내고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법에 호소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합니다.
영화 <김광석>에서 가수 김광석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특히 이 영화 <김광석> 개봉 전, 안타깝게 돌아가신 가수 김광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의혹을 밝혀달라"는 마지막 절규를 이상호 감독에게 남깁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아버지, 어머니가 남긴 간절한 절규에 대한 이상호 감독의 '결실'입니다. 그렇기에 이상호 감독은 '영화 <김광석>에서 밝혀낸 99.9%의 진실에 남은 0.1%의 의혹을 관객들이 채워줄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남은 0.1%는 합법적인 재수사입니다. '형사법적인 공소시효는 끝났으나 언론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이상호 감독의 명언이 우리 현실에서 확인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 <김광석>을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그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만 13년 전인 2004년 어느 날 밤 12시가 넘은 그 시각에 마주한 가수 김광석의 오디오 믹싱기를 통해 '마침내 복원시킨' 장준하 선생의 녹음 테이프처럼 저는 가수 김광석의 사인 의혹이 진실의 바다에서 인양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