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유럽은 피레네까지'라는 말이 전해져 왔다. 이는 유럽에서 스페인의 문화적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피레네산맥 넘어 바로 보이는 프랑스의 전원풍경을 스페인에서는 볼 수 없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황량한 대지의 풍경이 지평선을 따라 이어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건조한 풍토가 어쩜 스페인 사람들에게 투우와 플라멩고에 격렬하고 정열적으로 몰두하게 했는지 모른다.
유럽 스페인의 문화를 탐닉하는 이방인의 눈길은 안달루시아의 주도 세비야로 들어선다. 여행자의 대부분은 스페인의 문화는 투우와 플라멩고가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또'투우와 플라멩고로 가장 유명한 도시는?'하는 질문을 받으면 '세비야'라는 것이 정형화된 대답이다. 허지만 세비야는 비제의 <카르멘>,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모차르트의 <돈 지오바니> 무대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도시로 들어서자 한눈에 들어오는 세비야는 밝고 남국적이다. 도시의 색이 전체적으로 온화했다. 길가에 오렌지 나무가 늘어서 있으며 오렌지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길가에 늘어선 오렌지를 보면서 "아! 오렌지색", 오렌지색이, 살구색이 세비야의 색인 것을 알게 되었다. 건물의 벽면이나 골조를 이루는 기둥이 반드시 한 부분은 오렌지색으로 되어 있다. 길가에 모든 건물은 음영이 다른 오렌지색 건물로 이어져 행진하는 행렬을 보는 듯하다. 색이 주는 느낌 때문일까? 세비야의 어느 곳을 가도 편안함이 느껴졌다.
세비아 도시를 상징하는 색의 건물들
카스틸랴의 고도 톨레도에서 본 적갈색 건물들이 준엄함과 난공불락의 요새를 상징하는 색의 모습이었다면 세비야 오렌지색의 건물들은 스페인의 예술과 문화는 바로 이런 모습이고, 이렇게 마음에 부드럽고 잔잔히 스미는 향기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발길이 세비야 대성당에 이르렀다. 대성당을 천천히 숨을 고르며 관람했다. 뭔가 깊은 심연과 만나는 느낌이었다. 주머니의 동전을 손의 감각으로 만져봤다. 곧 사람들이 기도하는 예배소에 이르러 발길을 멈춘다. 조용히 다른 사람들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가슴에 늘 소망하는 것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헌금함에 동전을 넣었다.
다시 천천히 눈길을 히랄다 탑으로 돌린다. 히랄다 탑에 오른다. 발길을 쉬지 않고 옮겨야만 했다. 뒤에 따라오는 세계 도처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무언의 약속을 한다.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기, 방해 안 하기'이다. 그러기 위해선 쉼 없이 걸음을 옮겨야 한다. 부딪치거나 가로막지 않기 위해서이다.
히랄다 탑 전망대에 섰다. 전망대에서 세비야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보이는 시가지에서 세비야의 역사와 이야기가 흐른다. 세비야의 여러 방문 장소 중에서 가장 마음을 끄는 곳이 바로 이 히랄다(바람개비) 탑이다. 세비야 시내 중심에 있다. 회교도가 세운 이탑은 무려 높이가 97.5m이며 탑에 오르면 전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계단이 하나도 없는 불가사의한 구조이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는 무려 무게가 1톤 이상이나 되는 풍향계가 달려있다.
색을 느끼게 하는 세비야 거리를 거닐며 색에 대해 각별한 관점을 가졌던 작가가 생각났다. 책의 내용은 조금은 난해하고 지루했다. 2권으로 된 분량 때문이기도 했고 그림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과 사건이 생경하기도 했다. 색감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이 색이 주는 느낌을 따라가는 것이 벅찼다. 그림의 색, 사건, 사람의 감정을 아주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했다.
작가 덕분에 스페인에서 다른 나라보다 근거리에 있는 터키, 이스탄불을 색으로 보게 된 기회를 얻었다. 그는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을 <내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란 글로 한 편의 단편처럼 멋지게 발표한 작가 오르한 파묵이다. 소감문으로 파묵을 마음에 담았고 그의 책을 탐독했다. 얼마 전 읽은 그의 작품 눈(SNOW)에서 그는 다시 색에 대한 독특한 통찰력을 보았다. 눈은 흰색에 대한 서정시 같다.
이스탄불을 색으로 묘사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My name is red)은 59가지 챕터로 구성되었다. 1챕터가 내 이름은 빨강(My name is red)이다. 이 소제목을 첫 챕터의 시작으로 마지막 챕터까지 관통하는 빨강색에서 그가 느끼는 암울과 비통의 감정을 이끈다. 파묵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슬픔을 깊이 통삼하며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썼다.
파묵이 느끼는 빨강색을 보며 세비야의 투우가 전하는 빨강색을 다시 기억한다. 붉은 색이 주는 의미를 이 평온한 오렌지색의 세비야 도시로 어떻게 조율했는지 새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투우에서 보이는 강렬함은 빨강색의 피다. 번역자 이난아의 말을 빌리면 '빨간 색은 죽음 변화 혹은 신의 색'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스페인의 투우는 그들이 느끼는 절박한 죽음에 대한 항변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기 직전, 유년기의 마지막 시절에 들었던 시리아 동화가 떠올랐다. 혼자 사는 노인이 한밤중 잠에서 깨어 부엌에 가서 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물 컵을 탁자에 놓는데 그곳에 놓여 있던 초가 없어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실낱같은 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노인은 그 빛은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자기 침대에 낯선 사람이 손에 촛불을 들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이 물었다. "댁은 뉘시오?" 그러자 그 이방인은 "죽음이다"라고 대답했다.
오르만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1』 299면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에서 피의 빨강을 잃었을 때,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고 피력한다. 작품에서 파묵이 말하는 빨강이 죽음으로, 죽음이 검은색으로 화하는 지점으로 색이 무채색이 되어 무수한 현상을 직시하게 된다. 결국 색은 생존, 삶의 표현이 된다.
도시는 저마다 자신의 색을 갖고 있다. 이스탄불이 붉은 색이라면 스페인의 고즈넉하고 온화한 도시 세비야의 색은 오렌지색이다. 아마도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결렬한 마음을 투우나 플라멩고로 승화하여 그들만의 내면의 색인 오렌지색, 살구색으로 살아있음, 생존, 삶의 여정을 가시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볼까? 그 화두는 결국 자신의 잠재한 내면의 울림을 따라가는 여정이 된다. 이 여정으로 얻은 세비야의 온화한 색이 주는 평온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이후로도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