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두 사람(조봉암과 노무현)은 비슷한 점이 많다. 조봉암은 농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여 평등지권(平等地權)을 실현하고자 했다면 노무현은 토지보유세를 강화하여 좀 더 높은 차원에서 평등지권을 실현하고자 했다. 두 사람 모두 진보적 가치와 이상을 이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헌신한 사상가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진보성과 헌신성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지지를 받았지만, 평등지권을 추구했다는 이유로 이 땅의 부동산 권력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고 정치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평등지권을 실현함으로써, 지주가 위세를 부리는 '사이비 자본주의'를 자본이 자유롭게 제 역할을 감당하는 공정한 자본주의로 만들려고 했음에도, 두 사람은 똑같이 '좌파 빨갱이'로 매도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은 권력에 의해 직접,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권력의 압박에 의해 간접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 조봉암과 노무현의 뒤를 이어 평등지권의 이상을 추구하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꿈인가."

위의 글은 내가 2010년 여름 <역사비평>에 기고한 '평등지권과 농지개혁 그리고 조봉암'이라는 논문에서 썼던 내용이다. 지난 9월 4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들으면서 나는 예전에 품었던 나의 '지나친'(?) 꿈이 현실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추미애 대표는 1950년 조봉암 선생이 추진했던 농지개혁에 버금가는 지대개혁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이 개혁으로 대한민국의 멈춰진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가장 위대한 도전'에 나서자고 촉구했다.

본인의 확신과 의지가 담긴 추미애 대표의 연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4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4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 남소연

사실 의외였다. 평소에 추 대표가 토지정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고, 조봉암,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개혁정치의 바통을 문재인 대통령 같은 정통 친노 정치인이 아닌 추 대표가 이어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추 대표 주변에 토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뛰어난 참모가 포진하고 있고, 추 대표는 그가 써주는 연설문을 그냥 읽었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통한 소식통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추 대표는 헨리 조지(Henry George)와 그의 명저 <진보와 빈곤>, 그리고 우리나라 '헨리 조지 연구회'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본인의 확신과 의지로 이번 연설문의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추 대표의 이번 연설은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한국 사회 불평등과 양극화의 핵심에 지대 추구의 특권이 존재하며, 이를 그냥 두고는 소득주도 성장도 불가능함을 분명히 지적했다. '지대 추구의 덫'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부동산 보유세 강화가 불가피하다는 것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정치인 중에 이 정도의 인식을 가졌던 인물은 헨리 조지(조지도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치활동을 했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 쑨원(孫文), 영국 수상을 지낸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한국 농지개혁을 진두지휘했던 조봉암,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한 노무현 전 대통령, 19대 대선 경선 과정에서 국토보유세를 주창한 이재명 성남시장 정도다.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발목을 잡는 최대의 덫은 토지 불로소득이라고 인식했던 인물들이다. 토지 불로소득을 차단하거나 환수하는 제도를 도입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를 정의롭고 활력 있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지대 추구의 덫'에 걸린 대한민국

 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 김갑봉

추 대표가 말한 대로, 대한민국은 지금 지대 추구의 덫에 걸렸다. 임대소득과 자본이득을 합친 부동산 소득만 해도 매년 400조 원 이상(GDP의 30% 이상) 발생하며, 그 소득의 상당 부분을 소수의 부동산 부자들과 토지 투기에 몰두한 재벌·대기업이 차지한다. 기업은 생산적 투자로 이윤을 얻기보다 투기로 토지 불로소득을 얻는 일에 더 관심을 쏟고, 직장인은 월급을 알뜰하게 저축해서 노후를 대비하기보다 대출금으로 부동산을 사서 값이 오르기만을 기다린다.

반면, 경제 활력이 떨어져서 일자리가 새로 생기지 않으니 청년들은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받아서 자영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과당 경쟁과 높은 임대료 때문에 가게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진 돈 다 날리고 사업을 접는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제대로 먹고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리 빈둥빈둥 놀아도 날이 갈수록 재산이 늘어나는 부조리한 세상, 그것이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토지소유와 각종 특권에서 기인하는 불로소득, 즉 지대를 차단하지 않으면 이런 부조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단지 최저임금 좀 올려주고 복지 지출 늘리는 정도로는 턱도 없다. 지대 추구의 특권을 그대로 두고는 소득주도 성장도 불가능하다고 한 추 대표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추 대표가 헨리 조지의 이론과 조봉암의 개혁과 자신의 구상을 연결시키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다.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 사상, 조봉암의 농지 유상몰수-유상분배, 자신의 지대개혁이 모두 동일한 정신에 입각하고 있음을 이해하니 말이다.

이 셋을 관통하는 정신은, 천부자원으로 거저 주어진 토지와 자연에 대해서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똑같은 권리를 누리게 하자는 평등지권 사상이다. 평등지권이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만, 자본주의는 땀 흘려 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잘 사는, 정의롭고 활력 넘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국공유지 비율이 높고 그것을 잘 관리해 온 싱가포르와 핀란드가 이를 증명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농지개혁을 수행하여 상당 기간 고도성장을 구가한 대만과 일본과 한국도 대표적인 사례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보유세 강화를 중심으로 한 세제개혁에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으니 기대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다만, 그 개혁의 세부 내용을 밝히지는 않았고, 또 개혁 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깊은 고민의 흔적도 드러내지 않아서 약간 우려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건 지금부터 고민하고 연구해서 채워나가도 된다. 모든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과 방향이니 말이다. 부디 추 대표는 귀한 연설을 통해 천명한 입장을 쉽게 포기하지 말고, 더 깊이 천착해서 조봉암과 노무현에 못지않은 걸출한 정치가로 이름을 남기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허핑텅포스트에도 송고합니다.



#추미애#지대개혁#헨리 조지#조봉암#지대 추구의 덫
댓글1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위원장,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지식인선언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대구가톨릭대 교수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