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11일 오전 9시 42분]조지 리비(George D. Libbby, 1919〜1950)는 미 제24사단 공병대 소속 중사였다. 6.25전쟁 발발 이후 1950년 7월 20일, 대전지구 전투에서 미국군과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리비도 이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리비 중사는 산악 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 한 명 한 명을 모두 차량에 태워 후송하는 철수작전을 펼치던 중이었다. 하지만 작전 중 북한군의 사격을 받아 희생자가 발생하며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진다. 이때 리비 중사는 철수 중이던 포병 M-5 포차를 정지시키고 부상병들을 옮겨 태운 후 자신은 기관단총으로 도로 주변의 적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는 포차 운전병을 자신의 몸으로 감싼 후 계속 달리라고 외쳤다. 조지 리비 중사는 포차의 속력을 최대로 달리면서도 길가의 부상병을 보면 모두 포차에 태우고 철수하여 뜨거운 전우애와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전신에 수많은 총상을 입고 1950.7.20.일 전사했다. 자신을 희생하며 동료들을 구해낸 리비 중사는 6.25전쟁 최초로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Medal of Honor'를 받게 된다. 정전 직전인 1953년 리비의 정신을 기리고자 미 제2공병단이 파주 장파리 쪽과 임진강 건너 용산리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게 되는데 리비 중사의 희생정신을 기려 '리비교'로 명명하게 된다.
이 다리는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남한을 잇는 중요한 통행지점에 위치해 있다.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38선을 청와대를 향해 넘어왔다. 훗날 김신조가 목사가 되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동년 1월 18일 새벽에 리비교 다리 위에 보초 서고 있는 미군들의 동태를 망을 본 위 야음을 틈타 리비교 다리 아래 결빙구간을 통해 남으로 넘어왔다고 밝혔다. 이는 리비교는 남과 북을 잇는 루트의 하나임을 입증했다.
리비교의 다리의 길이는 297m로 임진강 상류에 주둔했던 미 2사단이, 1973년 철수한 이후에는 주로 군사용 도로와 민통선 내에 농지를 둔 농민들이 이용하였다. 얼마 전 교량에 대한 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통행이 어려운 E등급을 받자 안전을 염려한 군은 다리 건설 63년만인 지난 2016년 10월 14일부터 전면 통행을 금지했다. 명분은 군사상의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이유와 리비교 하류 쪽에 설치한 전진교와 리비교 상류 쪽에 있는 장남교를 이용하라는 안내문을 내 걸었지만 거리가 멀어 실효성이 의문이다.
당연히 리비교 바로 건너 용산리에 있는 농경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먼 거리를 우회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 30초면 리비교를 건너 자신이 경작하는 땅으로 갈 수 있는 곳을 연로한 농부들이 경운기를 끌고 3시간을 걸려 돌아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 당연히 기름 값 등으로 경제적인 손실도 만만치 않다.
시민들의 불편이 커지자 파주시는 여러 요로를 통해 리비교의 통행 재개를 요청했다. 리비교의 이용상 편리성과 리비교가 가지는 역사적인 중요성을 감안하여 파주시와 25사단이 적극적으로 리비교 문제를 협의했을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경기도와 제3군 사령부와의 민·군 정책협의회를 통해 이 문제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 건립된 지 50년 이상 된 시설물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문화유산등재를 문화재청에 신청하여 안보관광화 하는 등 여러 방안들도 나왔다.
리비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상판을 교체하여 통행하도록 하는 것인데 상판교체 비용만 해도 98억 원이 소요되고 리비교를 보존한 채 그 옆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는 데는 130억 원이 소요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처럼 예산이 들어가자 군은 작전상의 필요성을 상실한 리비교에 대해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판단 하에 리비교를 파주시에 무상양여 하는 방안도 논의 되었지만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소한의 액수로 파주시가 매입하는 방안으로 결론이 나는 모양새다.
파주시와 경기도는 리비교에 대한 소유권을 가져온 뒤 안전성을 확보하는 시공을 통해 사용하되 리비교를 감악산 등과 연계하여 안보관광 자원화 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렇게 할 경우 예산을 마련할 수 있는 명분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육군 25사단이 관리하는 전적기념물의 하나인 리비중사 추모비가 있다. 리비 중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추모비다. 그동안 군부대와 사전협의를 통해 들어 갈 수 있었던 리비교 입구는 굳게 철문을 걸어 잠근 채 창살을 통해서 다리의 정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리비 상사의 추모비도 취재를 하고 싶었으나 25사단 소속 5978부대 북진교 민통 초소가 폐쇄됨에 따라 연접한 도로 아래 강변에서 리비교의 옆모습만 바라볼 수 있었다. 리비교 아래는 파평 선단의 고기잡이배 몇 척이 철석거리는 파도를 자장가 삼아 한가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철교는 세워진지 63년이 경과한 만큼 멀리서 육안으로 보아도 녹이 슬어있는 곳이 보이고 많이 부식되어 있었다.
6차 핵실험이 강행되어 남북 간의 단절은 깊어만 간다. 통일은 고사하고라도 남북 간 화해무드라도 조성되어 남북이 맞닿은 경계까지 만이라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때는 먼 길을 돌지 않고 직진으로 리비교를 넘고 싶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다리 건너에 있는 하포리 허준 선생의 묘와 초평도, 해마루촌을 가보고 싶다. 이어 덕진산성,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도 가 볼 것이다. 구경을 마친 후에는 홀연히 통일대교를 통해 자유로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 아이러니지만 자유로에는 현재 그런 자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