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제기구를 통해 우회적으로 북한의 모자보건 사업에 8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14일 "유니세프와 세계식량계획(WFP) 등 유엔 산하 국제기구의 요청에 따른 대북지원사업에 대해 오는 21일 예정된 교류협력추진협의회(교추협)에서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인 지원 내역 및 추진 시기 등은 남북관계 상 등 제반 여건을 고려해서 결정할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구체적으로 정부는 세계식량계획의 아동·임산부 대상 영양강화 사업에 450만달러, 유니세프의 아동·임산부 대상 백신 및 필수의약품, 영양실조 치료제 사업에 350만달러를 공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사실상 결정된 상황이 아니냐"는 질문에 "교추협에서 보통은 원안대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수정되는 경우도 있어 예단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하지만 교추협(위원장은 통일부 장관이며 위원은 13개 관계부처 차관 위원과 민간위원 5명으로 구성)이 안건이 됐다는 것은 이미 관계부처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지원 결정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교추협에서 이번 지원이 결정되면 문재인 정부 들어 처음 이뤄지는 대북지원이 된다. 또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지원으로는 2015년 12월 유엔인구기금(UNFPA)의 '사회경제인구 및 건강조사 사업'에 80만 달러를 지원한 이후 21개월 만에 재개되는 것이다.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 "박근혜 정부와 차이 뭐냐"는 비판 감안정부가 이번 지원 검토에 나선 것은 통일부 당국자가 밝힌 것처럼 '대북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추진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박근혜 정부도 이같은 원칙을 갖고 있었으나, 2016년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지원 규모와 시기 등은 종합적으로 고려해 검토해 나간다'며 지원을 중단했다.
문재인 정부도 북한이 지난 7월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두 차례 발사실험한 데 이어 지난 9월 3일 6차 핵실험을 하고, 유엔 안보리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두 차례나 대북제재를 채택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번 대북 인도적 지원 방침을 정하는 데 상당한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오는 21일 교추협 결정이 나온다면, 6차 핵실험에 대한 제2375호 제재안이 채택(12일)된 지 불과 9일이 경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같은 방향을 택한 것은 '대북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추진한다'는 기본원칙과 최근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대북정책에서 박근혜 정부와 차이점이 뭐냐"는 비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북한이 일절의 남북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향후 대화 성사를 위한 밑자락을 깔아놓으려는 의지일 수도 있다.
"유엔 제재 위반 안돼"... 미국·유럽 4개국 등 올해도 대북 인도지원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관련 브리핑에서 "미국도 (오늘 정부의 발표를) 알고 있다 이번 일로 국제사회의 압박 기조를 흐트러트리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이번에 채택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75호에도 위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제 공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이다.
실제 2375호 26항은, 이번 제재에 대해 "주민들에게 부정적인 인도적 영향을 의도하거나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 지원 및 구호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국제기구 및 비정부기구의 업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이를 제한하는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님을 재확인"이라고 돼 있다.
이 당국자는 군사적 전용 우려에 대해서도 "우리가 제공한 돈을 갖고 유니세프 등이 전용이 어려운 의약품과 아동 영양식 등의 품목을 구입해 북한에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밝혔다. 이런 점을 종합해, 아동과 임산부 대상이라는 대표적인 인도 지원 분야, 그리고 직접 지원이 아닌 국제기구의 요청에 응하는 우회지원 방식을 통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대북지원이 중단돼온 우리와 달리, 미국과 유럽은 대북지원을 계속해왔다. 미국의 인도적 의료지원단체인 아메리케어스가 지난 4월 북한에 15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과 구호용품을 지원했다. 미국 정부 차원에서도 오바마 행정부가 올해 초 임기 마지막 날 유니세프를 통해 북한 수재민들에게 100만 달러를 제공한 바 있다.
유럽의 경우 WFP와 유니세프를 통해 올해 9월까지 러시아가 300만 달러, 스위스가 700만 달러, 스웨덴 150만 달러, 프랑스 49만 달러를 지원했다. 캐나다도 148만 달러를 북에 제공했다.
앞서 지난해 6월에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산하 인도주의적 지원 및 시민 보호 위원회(ECHO)가 "유럽연합이 1995년부터 130여 가지 대북 사업에 1억 3천 530만 유로를 사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럽은 유럽연합뿐 아니라 개별 민간기구 차원의 대북지원도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