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 어느 날, 책을 좋아하는 어떤 이가 전화를 걸어와 중고책을 파는 설렘자판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마 전, 집 가까이에 대형 쇼핑몰인 스타필드 고양이 개장했다. 그곳에 설치된 설렘자판기를 쇼핑몰 가까이에 사는 내가 이용해보고, 솔직한 후기 같은 것을 들려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다른 것도 아닌 중고책을 파는 자판기라니. 그것만으로 호기심이 불쑥 일었다. 그래서 자판기에 대한 그의 설명을 좀 더 듣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9월 달력을 펼쳐놓고 언제 갈까, 바쁜 와중에 날짜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9일) 오후, 쇼핑몰을 찾았다.
열어봐야 내용물을 알 수 있는 중고책 자판기
2017년 가을 현재 설렘자판기는 두 대뿐이다. 지인이 궁금해 한 집 근처 쇼핑몰 설렘자판기는 2호. 세상에서 단 두 대뿐인 자판기 중 하나인 것이다. 1호는 지난 6월 대학로에 설치됐다.
이용료는 5000원. 포장한 박스를 열어봐야만 내용물을 알 수 있는 무작위 추천방식이다. 그러니까 어떤 책인지 모르고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르는 선택할 수 있다. 로맨스, 추리, 여행, 지식교양, 아동, 힐링, 자기계발 그리고 랜덤. 이렇게 8개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랜덤을 선택하면 장르 구분 없이 나온다.
조금 더 설명하면, 설렘자판기 아이디어를 낸 사람들은 연세대 학생들로 구성된 '책 it out'(책잇아웃) 팀. 헌책의 가치를 제고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 '찾고 싶은 청계천 헌책방 거리 조성'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책 it out 팀은 앞서 '설레어함'을 운영해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 설레어함은 도서 큐레이션이 가능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들이 소비자가 선택한 주제에 맞는 책을 골라 배송해주는 것이다. 옥션에 입점해 8000만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설렘자판기는 설레어함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탄생한 것이다. 순수익 대부분이 청계천 헌책방에 간다고 한다.
쇼핑몰 2층 설렘자판기 바로 앞 쉼터에 앉아 누군가 이용해주길 기다렸다. 개장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쇼핑몰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자판기 앞에 멈췄다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20분쯤 지났나? 자판기 앞에 멈췄다가 가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이용하는 사람은 없어 설렘자판기 체험(?)을 망설이는데, 친구 사이로 보이는 두 사람이 자판기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선뜻 책을 선택했다. 한 사람만 설렘을 선택했다.
그녀는 장르를 선택하지 않고 랜덤을 택했다.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장르까지 선택하지 않으면 어떤 책이 나올까 더욱 궁금하고, 그만큼 설렐 것 같아서"란다. 포장된 책이 텅! 떨어졌다. 책 좀 보여줄 수 있을까 물었더니 선뜻 보여준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다. 중고책 파는 자판기라는데, 새 책에 가깝다. 누가 읽은 흔적이 전혀 없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보고 궁금했고, 꼭 이용해 보고 싶었어요. 가지고 있는 책이라 좀 아쉽긴 한데 돈이 아깝진 않아요. 취지가 참 좋잖아요. 이용하는 것으로 응원해주고 싶었거든요. 친구나 누군가에게 선물해줘도 의미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읽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남다른 의미로 가지고 있는 것도 좋을 것 같고."그녀에게 나온 책이 어떤가? 맘에 드는가? 끝까지 읽을 것인가? 등을 물었더니 이처럼 답했다.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인 그녀는 평소 책을 즐겨 읽는단다. 그럼 한 달 혹은 1년에 대략 몇 권 정도 읽는가? 물었더니 "읽던 책을 다 읽은 후 또 다른 책을 읽는다. 장르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라고 답했다.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읽어요. 내 의견을 말하거나 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요. 모르는 것도 알게 되고, 어떤 용어나 표현도 알게 되고. 물론 도움이 많이 되죠. 책의 힘을 실감하곤 해요. 앞으로도 책은 놓고 싶지 않아요!""지금 안 열어볼 거예요... 집에 가는 동안 무척 설레겠죠?"
박스를 펼치기 전까지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도록 책을 포장한 박스에는 청계천 한 헌책방 사장님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글과, 헌책방 가는 방법이 안내된 카드도 들어있었다. 그 카드 한 장에도 눈을 빛내며 즐거워하는 그녀에게 "자판기가 어떤가? 다시 이용할 마음이 있나?" 물어봤더니 "또 다른 장소에서 만나게 되면 이용해 볼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시 누군가를 기다렸다.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지만 선뜻 설렘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 먾지 않았다. 누군가의 설렘이 궁금해 1시간쯤 자판기 앞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그날 설렘자판기 앞에 있었던 것은 대략 1시간 반 정도. 여섯 사람이 설렘을 선택했다.
그중 제일 반가웠던 사람은 부모와 함께 온 고3 학생. 설렘자판기를 보는 순간 참 신기해 했는데, "고3은 엄마도, 선생님도,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아는데 많이 읽어요?"라고 물었더니 "공부는 공부고 책은 책. 추리소설을 좋아해 평소에 자주 읽는다"라고 답했다.
그 학생이 선택한 것은 두 권 다 추리소설.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많이 읽는 분야라서인지 두 권 다 읽은 흔적이 좀 많은 책이었다. 책 두 권을 들고 좋아하던 그 학생은 "얼른 집에 가서 읽고 싶다. 다음에도 몇 번이고 이용해 보고 싶다"라면서 좋아했다.
언젠가 친구와 실속있는 여행을 하고 싶어 여행 버튼을 선택한 커플에게는 어떤 책이 나왔을까? 궁금해 펼쳐보고, 책 관련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가가 어떤 책인가 보여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방긋 웃으면서 이처럼 사양했다.
"글쎄요? 어떤 책이 나왔을까요? 많이 궁금해요. 그런데 저도 집에 가서 볼 거예요! 집에 가는 동안 많이 설레겠죠?"대체적으로 누군가 자판기 앞에 서서 읽고 있거나, 책을 선택하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는 원하는데 부모가 그냥 가자며 끌고(?) 가는 사람도 몇 있었다.
그날 기자가 인터뷰했던 사람은 12명. 보이면 다시 이용해 보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차피 중고책인데 좀 비싼 것 아니냐?",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와 같은 이유로 "이용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직장인이다보니 일과 관련된, '영업 마케팅' 관련 책을 주로 읽는 편이에요. 설렘자판기 취지는 좋죠. 그런데 전 그다지 긍정적으로만 보이지 않아요. 요즘 사람들 감정에 호소하는 마케팅 정도로 보이고, 감정을 이용한 마케팅이 나쁘고는 할 수 없는데, 뭐랄까. 딱히 어떻다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중요한 뭔가가 빠진? 그런 기분도 들고...
어떤 책이 나올지 그야말로 모험이잖아요. 읽어야 할 책은 많은데, 이렇게 쇼핑 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내가 시간 쪼개어 꼭 필요하지 않은 책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좀 낭비란 생각이거든요." - 40대 직장인 남성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솔직히 이 사람처럼 꾸준히 책을 읽고 있으며, 읽어야 할 책이 많은 것에 비해 시간이 많지 않아 마음껏 읽지 못하는 나는 이 말에 상당히 공감했다. 그럼에도 이 설렘자판기가 보이면 많은 관심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크다.
"책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이 좋을지 모르는" 당신께"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가진 서울시의 유일한 헌책방 거리입니다. 하지만 줄어드는 책에 대한 관심과 대형 중고서점의 등장으로 인해 헌책방 사장님들은 현재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잊혀져 가는 헌책방을 지키기 위해 '책 it out'과 청계천 헌책방 사장님들이 힘을 모아 설렘자판기가 탄생했습니다. 오늘,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위한 설렘 한 권 어떠신가요?" - 설렘자판기 설명 중청계천헌책방 거리는 한때 200여 개의 점포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책읽기에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현재는 20개 정도로 세가 줄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책 잇 아웃 팀의 최종 목적은 청계천 헌책방거리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것. 나의 관심이 응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렘자판기 안에 있는 책은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수십 년간 장사를 해온 분들,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읽는 책을 알고 있는 사장님들이 추천하는 책들이다. 그만큼 괜찮은 책들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책소개 글을 써오면서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이 좋을지 막연해 막상 읽지 못한다"라는 사람들을 더러 만나기도 한다. 그처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괜찮은 추천이 될 것 같다.
나도 그날 2권의 설렘을 선택했다. 한 권은 그날 설렘자판기에서 만난,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게 선물했고, 한 권은 나를 위해 챙겼다. 그날 '앞으로도 이용할 마음이 있는가?' 묻는 내게 누군가 반문했다. "앞으로 이용할 생각이 있느냐?"라고. 물론이다. 그날 내가 선택한 설렘이 며칠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 내게 준 선물처럼 느껴져 지금도 내가 뽑은 책을 보면 설레기 때문이다. 내 돈 들여 선택한 설렘인데도, 참 묘하게도 말이다.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