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뮤지엄 산의 드로잉 재발견전2014년 8월 문은희 화백은 뮤지엄 산(Museum San)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교육실장 김성미가 보낸 것으로 9월부터 진행되는 <사유로서의 형식 – 드로잉의 재발견전>에 작품을 내달라는 것과 10월에 전시와 연계된 내용의 강연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전시작품 선정은 오광수 관장이 직접 했는데, 세 점의 스케치와 두 점의 수묵 누드를 선택했다. 그러면서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는 전시작품이 있으면 말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문은희 화백의 작품 5점이 2014년 9월 26일부터 2015년 3월 1일까지 뮤지엄 산에 걸리게 되었다. 스케치는 인물로 운보 김기창 선생, 석불 정기호 선생, 천상병 시인이다. 김기창 화백은 눈을 감은 모습이고, 석불 선생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천상병 시인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모습으로 얼굴에 고통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 세 사람은 문은희 화백 평생의 스승이자 후원자고 친구다.
두 점의 수묵 누드는 문 화백이 역작으로 생각하는 작품이다.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감는 모습의 여인으로 40호 정도 크기다. 가로 60㎝ 세로 120㎝로 상하가 길다. 그것은 인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팔과 다리 그리고 엉덩이에서 등으로 내려오는 선의 비례와 균형이 잘 맞는다. 허리 위로 표현된 한 줄의 척추, 목선과 어깨선이 간결하면서도 의미 있게 표현되었다.
또 다른 작품은 누드 군상으로 여인들의 움직임을 표현했다. 좌에서 우로 이동해 가는 느낌으로 마지막 시선은 오른쪽 여인의 엉덩이 부분에 집중된다. 그것은 히프가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또 머리와 얼굴을 거의 표현하지 않아 인물의 개성보다는 역동성에 중점을 두어 그림을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모두 80년대 절정기의 작품이다.
10월 11일에는 문은희 화백이 뮤지엄 산에서 강연을 하고 실기수업을 하는 방식으로 90분간 드로잉 강좌가 진행되었다. 강좌 제목은 "인체 드로잉–느낌에 의한 표현"이었다. 문 화백은 강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려온 수묵 누드의 발전과정과 기법을 소개했다. 그리고 누드 크로키와 선 드로잉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문 화백의 수묵 누드에서는 칼날 같은 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연유로 다양한 드로잉 기법 중 인체 드로잉에 관한 강의를 요청한 것 같다.
뮤지엄 산에서의 전시는 <시사 뉴스메이커> 2015년 1월호 「Korea Top Leader 소원 문은희 화백」에 소개되었다. 전체적으로는 문은희 화백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수묵 누드를 창조해냈다. 혼신의 에너지를 화선지에 쏟아 부어 영혼의 드로잉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문 화백의 전시를 알리고 있다.
"현재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뮤지엄 산에서 문 화백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뮤지엄 산은 오는 3월 1일까지 '사유로서의 형식 – 드로잉의 재발견전(展)'을 통해 문 화백의 작품을 전시한다." 이 전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단체전 형식을 띠었기 때문에 개개 작가의 작품이 관객에게 큰 영향을 주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필자가 문 화백의 작품을 직접 대면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2016년 나무화랑에서의 소원 문은희 수묵 누드전
2016년 5월에는 사위인 김진하 주관으로 나무화랑에서 <소원 문은희 수묵 누드전>이 열렸다. 나무아트 만사작(作)통 프로젝트 "잃어버린 선(線)을 찾아서"로 5월 11일부터 31일까지 3주 동안 누드 작품 25점이 전시되었다. 전시공간이 넓지 않아 수묵 누드와 누드 콜라주 대표작만 전시할 수 있었다. 이 전시는 문은희 화백의 존재를 알리는 마지막 회고전 성격이 짙었다. 그 이후에는 개인전이 더 이상 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철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는 전시회 카타로그에서 문은희 화백의 누드화를 "양강(陽剛)과 음유(陰柔) - 그 상생의 세계"로 표현했다. 양강은 웅장하고 동적인 남성성을 말하고, 음유는 부드럽고 우아한 여성성을 말한다. 문은희 화백이 웅혼한 필력으로 우아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 숭고함에 이르게 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의 양식을 분석할 때 사용하는 개념인 숭고한 아름다움과 우아한 아름다움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소원 문은희 화백의 작업은 양식상 전통적인 동양회화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 (…)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의 양태에 따르자면 양강의 동세가 두드러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류의 작업들이 음유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서정적 조형을 선호함에 반하여 작가의 작업은 오히려 강한 동세를 동반한 개성적인 작업으로 일관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진하는 여기에 더해 그림 속에 인물의 심리와 감정이 이입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문은희의 누드를 시기와 양식에 따라 수묵 누드와 누드 콜라주로 나눈다. 80년대 수묵 누드는 단 몇 개의 선으로만 구성되는 절제된 화면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인물의 정서나 심리를 응축해서 표현한다는 것이다. 화면에 드라마틱한 감정이입, 순간적인 표현의 절대성, 절제된 선으로의 환원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9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누드 콜라주에서는 감정이입보다 삶에 대한 사유와 통찰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림에서도 절제된 선보다는 형상을 채우면서 여백을 메워나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형상을 가득 채움으로써 사상과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 인생체험과 삶의 관조다. 체험에서 시대에 대한 통찰이 나오고, 관조에서 종교적인 성찰이 나온다. 통찰의 예가 4․19와 통일이고, 성찰의 예가 윤회, 회귀, 무상이다.
문 화백의 누드를 서양의 예술관과 비교해 보면
바로크시대 예술평론가인 빙켈만(J. J. Winckelmann)은 고대 그리스 예술의 특징을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Edle Einfalt und stille Größe)"로 보았다. "그리스 시대 인물을 표현할 때 감정적인 고뇌와 정신적인 절제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닷물이 표면에서는 노도처럼 출렁이지만, 깊은 곳에서는 조용한 이치와 같다"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독일 고전주의는 내면에 존재하는 조화와 아름다움 그리고 절제를 최고의 예술이상(Kunstideal)으로 생각했다.
문은희 화백의 누드화에서 바로 이와 같은 고대 그리스 예술이상이 나타난다. 단순한 듯 고상하고, 조용한 듯 우아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절제된 감정표현이 더해져 외적인 아름다움이 내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문 화백은 그리스 시대와 독일 고전주의 시대 예술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은희의 차원 높은 예술이상을 이해하는 관객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2000/2001년 회고전에 비해 2016년 전시회를 찾은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화백의 예술여정이 내리막길을 걷는다는 생각이 든다. 문 화백은 이제 화암화실에서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날을 보내고 있다. 새로운 예술적 시도도 불가능하고, 교류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또 다른 아픔들이 닥쳐온다.
둘째 아들 태연이 갑자기
2017년은 문은희 화백에게 불행과 어려움이 닥친 해였다. 둘째 아들과 김구산 선생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아픔과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 태연은 문 화백과 함께 예술가의 길을 걷는 동지로,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황태연은 일본에서 디자인대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생업으로 인테리어를, 예술로는 목공예를 전문적으로 했다. 그러던 그가 어머니를 돕는다고 2000년대 들어 귀국했다.
그는 2008년부터 6년 동안 어머니의 작품정리를 하고난 다음 2016년 8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폐암이다. 폐암을 발견한 것은 2016년 2월이었다. 예술가로서의 스트레스와 목공예를 하는 과정에서 폐로 들어간 분진이 원인으로 여겨진다. 화장을 통해 남겨진 태연의 유골은 현재 문 화백의 아틀리에 앞마당에 묻혀 있다. 자식을 가까이 두고 싶은 문 화백의 마음 때문이었다. 지금도 작은 아들의 화실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김구산의 죽음
둘째 아들 태연의 죽음에 앞서 김구산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김구산는 문 화백의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해준 사람이었다. 1987년 광주 전시회를 찾아 인연을 맺었고, 그 후 「자연, 인생, 예술」등에서 문화백의 예술세계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1993년 충주호변 화암리에 자리를 잡은 인연으로, 문 화백이 1994년 화암리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구산 선생도 문 화백의 정신적 예술적 후원자다.
그러나 김구산 선생도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다. 중앙대 교수, 승려, 불교학자 등을 거치며 좋은 일보다는 어려운 일을 더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불행이 겹쳐 건강이 악화된 때문인지, 그는 2016년 8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 화백은 아직도 김구산 선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