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보리밭과 밀밭의 차이를 아세요? "지난 9월 19일, 수원시 세류동 버드내 도서관에서는 치매예방과 건강 미술이란 주제로 신현옥 치매 미술치료협회 대표의 초청 강의가 있었다. 서양화 전문가인 이 강사는 미술을 통해 어르신들께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겸손히 말했다.
"한 어르신께서 보리밭을 그렸어요. 그러더니 제게 묻는 거에요. 보리밭과 밀밭의 차이를 아느냐고. 몰라요 했더니 가르쳐주셔요. 보리밭에는 고랑이 있지만 밀밭에는 고랑이 없대요. 그러면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셨어요. 당신 아버지께서 저녁 밥상머리에서 화를 내셨는데, 누가 우리 보리밭을 자꾸 헤쳐 놓는다고, 무슨 짐승인지 모르겠다고... 누가 그랬을까요? "32년 전 치매를 맞은 어머니를 떠나 보냈던 그녀는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보다, 아무 이야기나 듣고 싶어 무작정 엄마 친구분들을 찾아갔다. 그러다 자신의 돈을 털어 한국 치매 미술치료협회를 세워 버렸다. 그림을 통해 치매 어르신들과의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보리밭 그림으로 말문이 터지신 그 어르신은 그 날 이후로 정말 달라지셨어요. 치매 중증으로 넘어가지 않으셨죠. 건강미술치료는 그림을 통해 기억을 나누는 거예요. 그렇지만 치매 환자는 상징적인 것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실마리를 찾기가 힘듭니다. 치매 예방은 대화만 통해도 쉽게 이뤄져요. "
"몇 년에 걸쳐 목단꽃을 그리신 어르신이 계셔요. 그 옛날 결혼할 때 혼수에 일일이 수를 놓았다죠. 사람들이 자기가 목단꽃을 그려 수를 놓으면 그렇게 좋아하고 칭찬해주셨대요. 소나무도 잘 놓았지만 그건 너무 힘들대요. 꽃 이야기에 웃음을 보이시면 꽃을 그려보았지요. 할머니들은 또 반지를 그렇게 좋아하셔요. 가을에는 산소(묘지)를 그리는 어르신들이 참 많으셔요. ""남자분들은 첫사랑에 대해 많이 그리고, 여자분들은 자손들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많이 그리셔요. 남편 무덤을 그려 놓고 자식들이 잘 찾지 않아 속상하다는 마음을 털어놓기도 하셨어요. 날이 흐려지거나 안개가 끼면 색의 분별력이 없어지는 것도 보았어요. 같은 줄기에 칠하는 색이 달라졌거든요. 차가워지는 가을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가을엔 생각이 깊어 지시는지 그림도 약간씩 달라졌죠."
"그림을 그리는 게 처음엔 다 막막해요. 치매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예요. 선긋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몇 년 지나면 글자도 씁니다. 동그라미 3년 걸린 어르신이 계셨어요. 어느날 네모를 그려놓고 이게 뭔 줄 아냐고 제게 묻는 거예요. 모르겠는데요, 했죠. 시루떡이야 그러셔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선생님도 시루떡 한쪽 드실래요? 제가 그 말씀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지요."그 때 들은 말 한마디를 가슴 깊이 간직해 온 탓일까, 버스 안에 어르신의 그림을 두고 내렸던 날 미친듯이 그걸 찾아 헤맸다던 치매미술협회의 대표님은 그 소중한 그림들을 하나도 버릴 수가 없어 아예 '건강미술 역사박물관'을 세류동에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어르신들을 만날 때 첫 사랑을 만나듯이 꼭 향수를 뿌리고 갔다.
강의 참가자들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통해 , 신현옥 대표가 교감해온 순간들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동화책에서나 읽음직했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들이 토막토막 이어졌다.
"주인집하고 싸움이 나 쫓겨나게 된 거야. 막막하고 속상했지. 아이들이 뭘 알겠어."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놀던 아이들을 비둘기로 담아냈다. 빨간꽃 그림은 어릴 때 부르던 빨간 꽃 노래를 그린 것인데, 할머니는 그 노래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걸 확인시키며 직접 불러주셨다. 또 두 손녀를 찾아가다 죽고만 할미꽃 이야기는 여러 장에 걸쳐 그려 한 권의 동화책을 완성했다.
"내가 외가에서 셋이 살게 되었어. 할머니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 듣는 재미가 좋았지. 엄마는 일만 했어. 내가 감자를 너무 좋아해서 어느날 엄마한테 나 감자 나물 좀 해주세요 그랬는데 그 날 밥상에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엄마 앞에서 삐쳐버렸더니 그런 날 보시고 밭에 나가 감자를 바로 캐와서 해주시더라고." "그런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어. 난 친구들과 나물 캐러가는 바람에 가시는 줄도 몰랐어. 가신 날 저녁에 할머니 왜 엄마 안 오세요 물었더니, 할머니가 나를 꼭 껴안고서는 '응 엄마도 이제 엄마 살러갔다' 그러시는 거야..." 화면 속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셨다.
"나도 다 늙어 남편 먼저 보내고 난 뒤 엄마랑 같이 잠시 살았었어. 내가 그 때 엄마한테 서운했던 얘기 다 털어놨지. 그때 나를 껴안고 우시던 게 아직도 생각이나..."
우리도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서로 교감하는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말하던 신현옥 대표는 9월 21일이 치매 극복의 날이라며 청중에게 부탁했다.
"부모님 살아계신 분? 여러분은 정말 행운아예요. 기회가 있으시니까요. 전화 자주 드리세요."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했던가? 버드내 도서관에 들어서면, 전시된 책 뿐 아니라 걸어다니는 책도 많이 볼 수 있다. 바로 어르신들이다. 치매 극복 선도 도서관으로 지정되었다고 버드내를 소개해 준 이명옥 팀장은 이 도서관에 어르신들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 아이들 모두 와서 책과 이야기로 교감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