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인권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인권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의 삶은 험난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암과 투병하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기도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오마이뉴스>는 인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서창호씨가 승용차 보닛 위로 철퍼덕 넘어졌다. 창호씨 위로 경찰 여러 명이 다른 경찰에 의해 밀려 넘어졌다. 경찰에 깔린 창호씨가 "사람 죽는다"라고 소리쳤지만, 몇 분 동안 다들 꼼짝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렇게 9월 7일 경북 성주 소성리의 새벽이 지나갔다. 경찰 수천여 명은 "사드 반대"를 외치며 마을 길목을 막은 주민과 전국에서 온 시민들을 끌어냈다. 창호씨가 이끌던 인권침해감시단은 이날만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창호씨는 사드가 배치되고 날이 밝자, 대구로 떠났다. 할 일이 많은 날이었다. 어둠이 내린 뒤 집에 닿았다. 늦은 밤 무릎에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고, 심지어는 침대에 누운 채 소변을 봐야 했다.
결국 이튿날 오전 119 구급차로 병원에 옮겨졌다. 십자인대 부분 파열이었다. 7주 진단이 나왔다. 최소 일주일은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환자복을 입은 채 다시 인권활동과 회의를 위해 몰래 병원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지난 20일 대구에서 창호씨를 만났다. 그는 집 앞 카페에서 다리에 깁스를 대고 휠체어에 앉은 채, 기자회견문을 다듬고 있었다. 소성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의 얘기를 듣다가 의문이 들었다. 그는 왜 쉴 수 없는 걸까. 도대체 그에게 인권이 뭐기에,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그는 슈퍼맨이다
창호씨는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다. 이 단체의 유일한 상근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의 몇 안 되는 인권활동가다. 대구 인권활동가 사이에서 창호씨의 전화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해요. 서창호가 전화하면 부담스럽다고. 또 무언가를 하자고 제안하니까. 마음먹고 전화를 받아야 한대요. 하하."그는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활동부터 대구 수성구 노점상 문제까지 대구·경북의 인권운동 판에 안 끼는 데가 없다. 창호씨는 일중독자다. 아니, 인권운동에 중독됐다. 창호씨는 다른 단체에 새로운 활동을 제안해 연대 기구를 꾸리는 일을 도맡아하고 있다. 대구시가 그를 대구시 인권을 총괄하는 자리인 대구광역시 인권보장 및 증진위원회 위원장에 앉혔을 정도다.
창호씨가 7주 동안 쉬어야 하는데도, 쉴 수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인 1994년부터 사회를 바꾸는 일에 몸을 담았다.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대구 인권운동 판에 터줏대감이 됐다.
비정규직 문제, 신용불량자 문제에 큰 관심을 뒀다. 8개월 동안 부동산 중개업을 해서 번 돈으로, 2005년 지금의 인권운동연대를 꾸렸다. 그는 지금껏 휴가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어느덧 그는 마흔넷의 중년이 됐다. 인권운동에 청춘을 다 바친 것이다.
지칠 때도 많았을 것이다. 인권운동이라는 게 내 몸과 생활을 챙길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슈퍼맨이 아닌 이상,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왜 이렇게 일을 벌이세요?"라고 채근하듯 물었더니, 그는 겸연쩍은 얼굴로 답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대구에 인권단체가 많지 않으니,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어요. 또한 각 단체들이 서울에 비해 규모가 작다보니 서로 연대하는 게 하나의 특색이에요."대구와 인권
서울에서도 인권운동은 힘든 일이지만, 서울이 아닌 곳에서는 더욱더 고단한 일이다. 큰 관심을 받기 어렵고, 몇 안 되는 작은 인권단체에 일이 몰린다.
창호씨는 대구에서 청소년 노동인권 보호 조례를 만들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자유한국당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대구시의회와 8곳의 군·자치구의회 가운데 조례안을 통과시킨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기독교단체들이 조례가 통과되면 성소수자 청소년에게도 노동교육을 하는 것 아니냐, 그래서 동성애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어요. 여기에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부화뇌동하고 있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죠." 대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핵심 지지기반이다. 박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것도 쉽지 않다. 2015년 세월호 참사 1주기 때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때 30~40명이 모여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했어요. 할배 2명과 할매 2명이 와서 '세월호 많이 해묵었다 아이가'하면서 현수막과 마이크를 빼앗으려고 했어요. 그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어요. 시민들의 보수성도 심화되는 것 같아요. 대구에서는 인권이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생각에, 힘들었죠."창호씨는 대구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인권팀장이다. 대구퀴어문화축제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지난 23일 부산에서 처음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그 전까지 서울 이외에 퀴어문화축제를 연 곳은 대구가 유일했다. 대구에선 지난 6월 9번째 축제를 치렀다.
"6회 때까지는 기독교단체가 우리 축제를 몰랐던 것 같아요. 2년 전부터는 기독교 단체의 방해가 시작됐어요. 그때 기독교단체에서 먼저 집회신고를 하기 위해 이틀 동안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더라고요. 겨우 축제가 열렸는데, 기독교 신자 일부가 인분을 뿌리기도 했어요. 다행히 올해는 큰 충돌이 없었네요."월급 50만 원
창호씨는 참 열심히 살았다.
"억지로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힘이 들었으면 진작 그만 두었겠죠. 남이 안 된 모습을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도 있어요. 어머님이 거리에서 어려운 분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거든요. 어릴 적부터 그런 모습을 본 게 지금도 제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아요."하지만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 속이 답답해지고 한숨이 나온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월급을 물었다.
"50만 원." 100여 명의 후원자가 보내는 돈 가운데 사무실 월세와 유지비를 빼고 남는 돈이다. 굳이 최저임금과 비교하지 않아도, 생존이 불가능한 월급이다.
그나마 아르바이트나 인권강의를 하면서 50만 원가량 번다. 지난해까지 오전에 장애인 활동보조인으로 일했지만, 인권운동과 병행할 수 없어 일을 그만뒀다.
"한 달 생활비는 100만 원 남짓이에요. 집 월세를 내야 하고, 기름 값도 많이 들어요. 여기저기 다녀야 하니까. 여기에 각종 공과금을 내면, 사실 생활이 안 되죠."인권운동연대의 유일한 상근활동가로 몸이 몇 개라도 모자를 판이니, 후원회원을 모집하는 일은 꿈도 못 꾼다. 후원주점을 여는 일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많은 단체에서 후원주점을 하는데 저희까지 하면 서로 피 팔아먹는 일이잖아요."창호씨는 자신 걱정은 말아달란다. 혼자 살기 때문에 100만 원으로도 살 수 있단다. 문제는 대구 인권운동의 미래다.
"괜찮은 활동가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월급을 많이 줄 수 없으니까, 같이 하자고 말을 못하죠. 저야 이렇게 산다고 해도, 이게 바람직한 건 아니잖아요. 한두 사람의 의지나 희생을 통해서만 인권운동이 이어지는 구조 말이에요. 활동가들에게 이런 구조에 들어오라고 말할 수 없어요. 서글프죠." 2년 전 산업재해 인권단체인 대구 산업보건연구회가 문을 닫았다. 상근할동가 한 명이 그만두면서, 더 이상 일할 사람이 없었다. 대구지역의, 아니 전국의 풀뿌리 단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원칙주의자
그날 대구와 소성리를 오갈 때 조정훈 <오마이뉴스> 대구주재기자가 차를 운전했다. 그와 창호씨는 20년 지기 선후배 사이다. 대구지역 독립대안언론 <뉴스민>의 이사인 두 사람은 어느 범위까지 광고를 받아야 하느냐는 두고 논쟁을 벌였다.
창호씨는 정체성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광고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정훈 기자는 직원들에게 생활임금은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창호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 숨을 내쉬었다.
창호씨에겐 꼬장꼬장한 면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원칙만은 지킨다. 인권운동연대 같은 경우도 중앙·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독립적인 인권운동단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는 23년 동안 활동가로 일하면서 원칙을 고수하며 살았다. 그 동안 대구사람 사이에 인권이 조금이나마 스며들었다면, 창호씨 같이 원칙을 고수한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그와 헤어지면서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는 말을 건넸다. 그는 말했다.
"추석 연휴 때 부모님께 가야 하는데, 아직 다쳤다는 말을 안 했어요. 놀라실까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네요. 하하."* 오마이뉴스 '인권 이즈 커밍' 공동기획팀신나리·신지수·선대식(글), 이희훈(사진), 최유진(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