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9월 29일) 오후, 임진각으로 뻗은 자유로변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문지리와 오금리의 황금들녘을 오랫동안 내려보았습니다.
내가 이주해 뿌리내린 헤이리 인근에는 이렇듯 너른 들이 있어 적잖게 위안이 됩니다.
갈현리 들판이 새로 연장된 357번 지방도(제2자유로)에 의해 두 동강이 났지만 서울이나 중국에서 온 파주프리미엄아울렛의 쇼핑객들은 여전히 느른 들판의 풍경을 덤으로 가슴에 담아 갈 수 있습니다.
헤이리에서 LG디스플레이로 가는 도로 연변 금산리와 만우리, 축현리와 금승리가 들판으로 남아있습니다.
벼가 고개 숙인 황금들녘을 보면 고향이 생각나고 그 고향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아버지의 지독한 노동으로 기억됩니다.
미리 물에 담근 볍씨로 못자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내기, 김매기, 물관리 그리고 추수까지, 추수는 다시 베기, 말리기, 단묶기, 옮기기, 탈곡, 도정까지 아버지의 노동은 한순간의 끊어짐도 없이 촘촘하게 이어졌습니다. 낫과 지게, 멍석, 가마니는 모두 아버지의 육신을 소비하는 일이었습니다.
밥상 위의 흰쌀밥 한 알이 봄부터 가을까지의 모진 노동의 결과임을 아는 나는 밥공기에 밥 한 알 남기는 것은 허리 굽어 굳은 아버지의 노동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노동을 알 턱이 없는, 대처에서 나고 자란 내 아들딸들이 밥공기의 밥 한 알 남기는 것조차 나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이승의 사람이 아니고 벼농사는 이양기와 콤바인, 그리고 트랙터가 사람의 품을 대신합니다.
서구화된 입맛은 빵과 고기가 식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타작 후 마당에 떨어진 벼 알곡 하나까지 줍던 귀한 벼는 점차 저소득층만의 주식으로 변화되고있습니다.
정부는 쌀의 공급과잉에 대한 대응책으로 공공비축미뿐만 아니라 시장 격리곡을 대폭 늘이는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쌀값의 시장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에서 쌀을 사들여 필요 이상 시장으로 공급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입니다. 비축된 쌀의 소진을 위해 사료용 쌀을 늘이고 해외 원조를 늘여나갈 요량입니다. 쌀은 이제 지천이 된 것입니다.
이 황금들판도 벼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보조금을 주는 제도인 논농사직불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끼니를 때우는 일이 호랑이보다 무섭고 쌀이 황금보다 소중했을 춘궁기의 시절은 아버지와 함께 가버렸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황금들판을 마주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