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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점호화 소비'. 늘 거리낌 없이 쇼핑하는 건 아니지만, 특정한 물건을 사는 데 있어선 돈을 아끼지 않는 소비 패턴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일본에서 넘어온 개념인데, 썩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반려묘 사료만큼은 비싼 걸 사는 집사, 1000원짜리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지만 텀블러만큼은 '고급진' 걸 고르는 친구 등...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유별난' 소비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우리네 삶은 흐르는 물과 같다."

2008년 개봉한 영화 <버킷리스트>에 나오는 대사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두 노인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과 카터 체임버스(모건 프리먼)는 어느 병원의 같은 병실에서 만난다. 인생의 마지막에 두 사람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작성하고, 하나씩 이뤄나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중 하나가 '타투 하기'였다.

영화가 개봉한 해, 나는 워킹홀리데이로 훌쩍 호주로 떠났다. '무얼 향해 달려야만 하는지' 회의가 가득하던 시절, 무작정 계획 없이 시작한 여행이었다. 호주 시드니에 있는 숙소에서 영화 <버킷리스트>를 보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다. '타투를 새기고 싶다'고 마냥 생각하던 걸 직접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내 몸의 여백'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 때, 몸을 바로 움직였다. 도심에 있는 타투샵에 갔는데, 간판에 '시드니에서 가장 오래된 타투샵'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첫 타투'는 누구에게나 가장 고민되기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새기면 지워지지 않는' 특성을 감안해 평생 기억할 만한 것을 새기기로 했다. 그때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문구가 떠올랐고, 바로 인쇄해서 타투샵에 가져갔다.

 왼쪽 등에 새긴 문구. "세상이 비록 고통스러운 것들로 가득할지라도, 또한 그것을 이겨내는 것들로도 가득하다"는 뜻. 헬렌 켈러가 남긴 말이다.
왼쪽 등에 새긴 문구. "세상이 비록 고통스러운 것들로 가득할지라도, 또한 그것을 이겨내는 것들로도 가득하다"는 뜻. 헬렌 켈러가 남긴 말이다. ⓒ 김준수

'Although the world is full of suffering, it is full of overcoming of it.'

"비록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들로 가득할지라도, 또한 그것을 극복해내는 것들로도 가득하다"라는 뜻의 문장. 내 삶의 고비마다 떠올리면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처음 타투를 새길 땐 다소 충동적이었던 터라 '누가 한 말인지'도 미처 찾아보지 않았는데, 훗날 헬렌 켈러가 남긴 말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가수 '요조'가 인터뷰에서 본인의 타투에 관해 말한 바 있다. '타투를 한 번 하고 나면 그 이후부턴 타투하지 않은 부분이 (채워야 할) 여백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첫 타투를 한 이후 내 심정이 정확히 그랬다. 인터넷에서 '다음 타투'를 위해 참고할 문양을 찾고, 타투이스트에게 도안을 의뢰한 직후 '다다음 타투'에 넣을 문양을 찾기 바빴다.

사실 호주에서 처음 타투샵에 갔을 때도 큰 도안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나 가슴을 덮는 크기의 타투에 마음이 이끌렸다. 하지만 타투이스트에게 도안의 가격을 물어보자 500달러(약 44만 원)에서 1000달러(약 88만 원)를 훌쩍 넘어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개를 떨굴 수밖에.

결국 150달러(약 13만 원)를 들인 레터링으로 만족해야 했다. 난 당시 가난한 워홀러였고, 100만 원가량의 돈을 타투에 고스란히 쓰긴 힘들었다.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자'는 생각을 버리고 호주로 떠난 상황이었지만, 주머니가 너무 가벼워서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헬렌 켈러의 명언을 레터링으로 새긴 후, 귀국해서 다음으로 데려온 타투는 '고래'였다. 별과 별 사이를 가르며 날아가는 우주의 고래를 가슴에 새긴 것이다.

타투는 내 삶의 일부가 됐다

호주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우주를 비행하는 고래' 문양을 데려온 셈인데, 섬세하게 고래 주름까지 표현하는 타투이스트의 실력에 감탄했다. 푸른색과 녹색으로 별과 우주의 음영을 묘사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불안할 때, 심해에서 조용히 홀로 헤엄치는 고래를 떠올리면 안정이 되곤 했으니 타투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작업비 이외에 시술 후 바르는 연고와 멸균거즈(등에 한 타투의 경우 잠자리에 들기 전에 거즈를 발라야 했다) 등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평소 작은 상처가 생겨도 연고를 바르지 않는 편이었지만 타투 도안이 섬세하게 남고, 잘 아물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8천 원짜리 연고를 여러 개 사서 발라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호주에서 워홀러로 지내던 때와 달리 정기적인 수입이 생기자 타투에 마음껏 돈을 투자했다. 매 타투마다 수십만 원의 비용이 들었지만, 평생 가지고 살 문양이라고 생각하면 '몇만 원 더 아끼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왼쪽 가슴에 새긴 타투. 우주를 비행하는 고래 문양이다.
왼쪽 가슴에 새긴 타투. 우주를 비행하는 고래 문양이다. ⓒ 김준수

고래 타투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의뢰를 맡긴 도안은 '트라이벌' 타입이었다. 트라이벌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부족 간의 차별성을 띠도록 다른 형태의 문양을 새긴 것에서 유래됐다. 주로 전사들이 얼굴이나 어깨, 가슴에 새긴 타투였는데 최근에는 스포츠 선수를 비롯해 타투를 찾는 사람에게 인기가 많다.

팔에 두른 트라이벌 타투에는 코끼리와 원숭이를 도안으로 넣었다. 아이폰 이모티콘으로도 유명한 '쓰리 와이즈 몽키(3 Wise monkeys)'인데, '사악한 것을 보거나 말하거나 듣지 않으려는 원숭이'로도 알려졌다. 평소 '말조심하자'는 결심이 '말뿐인 다짐'으로 끝나곤 했는데, 이 타투를 얻은 이후로는 실천이 조금은 더 쉬워졌다.

 오른팔에 새긴 '트라이벌' 타입 타투. '사악한 것을 보거나 말하거나 듣지 않으려는 원숭이'도 문양에 포함됐다.
오른팔에 새긴 '트라이벌' 타입 타투. '사악한 것을 보거나 말하거나 듣지 않으려는 원숭이'도 문양에 포함됐다. ⓒ 김준수

오른쪽 손목에는 세미콜론 타투(;)를 새겼다. 지난 1년 6개월간 우울증을 겪은 나 자신을 위로하는 차원이기도 했고, 주변에서 소리 없이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세미콜론 타투 새기기는 비영리 정신건강단체 '더 세미콜론 프로젝트'가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시작한 캠페인의 일환이다.

이 단체는 '세미콜론은 글쓴이가 문장을 끝맺을 때 쓰기도 하지만, 끝맺지 않기로 했을 때도 쓴다'며 '글쓴이는 당신이며, 문장은 당신의 삶'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말하자면 '당신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타투가 왜 좋으냐고 누가 묻는다면,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새기기로 결심한 것부터 도안을 타투이스트와 상담하며 정하고, 비용을 치르며 몸에 남기는 부분까지 말이다. 그리고 타투이스트와 도안에 관해 의논하며 '세상에서 유일한' 문양을 나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서 새긴다는 점도 날 두근거리게 만든다. 어쩌면 이런 경험이 내 삶에서 흔하지 않기 때문에 타투에 더 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미를 담아 새긴 타투는 이제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부분이 됐다. 지금까지 타투에 들인 돈은 백만 원이 훌쩍 넘지만 '이 돈이라면 OO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 따윈 해본 적이 없다. 가장 의미있는 부분에 쓰는 돈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내게는 일상에서 늘 곁에 두면서 원할 때 볼 수 있는 타투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도안과 시술에 정당한 가격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

다음번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비춘다는 뜻의 '등대'나 든든하게 의지한다는 의미를 담은 '닻' 타투를 새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나는 내 마음에 드는 도안의 타투라면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어떤 타투를 다음에 새기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 삶의 흐름에 따라 의미있다고 느끼는 것을 문양으로 남길 거다. '우리네 삶은 흐르는 물과 같다'던 <버킷리스트>의 대사처럼.

 타투 바늘.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잉크가 새겨진다.
타투 바늘.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잉크가 새겨진다. ⓒ 김준수



#타투#버킷리스트#일점호화소비#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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