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인권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인권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의 삶은 험난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암과 투병하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기도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오마이뉴스>는 인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제주에 살았지만, 제주를 본 적 없다. 유채꽃도, 성산 일출봉도, 천지연 폭포도 문애린씨 눈앞에 펼쳐진 적이 없다. 모슬포 항구 근처에서 10년을 살았지만 정작 바다를 본 건 딱 한 번뿐이다. 한 번 만이라도 밖에 나가고 싶다는 애린씨의 눈물에 할머니가 함께 나선 어느 어린이날이었다.
어린 시절, 애린씨는 집 마당에 있던 나무 한 그루만을 바라봤다. 나무는 울타리이자 장벽이었다. 그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나무 아래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혼자였다. 엄마도 아빠도, 함께 산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늘 일하러 나가야 했다. 어른들이 끼니 때 들르는 집에서 대여섯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뛰어놀았다. 마당 밖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만 봤다. 그 날 저녁,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양쪽에서 고무줄을 잡아달라고 했다. 한두 번 고무줄 사이를 오간 애린씨를 부여잡고 할아버지는 한참을 울었다. 애린씨는 '이건 하면 안 되는 거구나.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내가 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얌전하게 조용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했다.
애린씨는 제힘으로 오롯이 걸어본 적 없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뇌성마비 장애 1급이었다. 뇌성마비는 생각과 몸을 떨어뜨려 놓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틀어지고 경직된다. 왼쪽 팔이 안으로 굽어지고 오른쪽 다리가 굳어지는 동안 애린씨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부모님은 애린씨를 데리고 침술원을 찾고 안수기도를 받게 하다 굿을 했다. 뇌성마비가 나아질 리 없었다. 애린씨는 마당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됐지만, 갈 수 없었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매일 초등학교를 가야했는데, 업어줄 사람이 없었다. 해녀인 할머니는 물질해야 했다. 부모님은 다른 일을 찾아 곧 제주도를 떠났다. 열 살이 됐지만 애린씨는 한글을 몰랐다.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
"애린아, 우리 그냥 둘이 죽을까..."열한 살, 애린씨는 부모님이 있는 강원도로 갔다. 할머니 등에 업혀 비행기를 탔다. 부모님은 강원도의 한 돼지농장에서 일했다. 농장 옆 작은 집에 살며 새벽 4시부터 시작하는 농장일을 했다. 농장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학교는 애린씨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없어 부담스럽다는 뜻이었다.
가족이 모든 장애를 책임져야 하는 시스템 안에서 애린씨는 어떤 지원도 교육도 받지 못했다. 강원도에서도 애린씨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집이 전부였다.
애린씨의 엄마는 아침마다 ㄱ,ㄴ,ㄷ, 가, 갸, 거, 겨를 따라 쓰는 숙제를 주고 출근했다. 혼자 남은 집에서 애린씨는 처음 한글을 마주했다. 그렇게 수백 번을 따라 쓰며 열두 살에 처음 한글을 익혔다. 집이 얼마나 답답한 공간인지, 집안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게 사람을 얼마나 옥죄는지 그제야 글로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집 안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읽고 쓸 수 있는 것들을 따라 쓰며 살았다. 애린씨에게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따로 없다. 모두 집안이었다.
엄마가 일하러 나간 어느 밤. 아빠 옆에 누워있는 애린씨에게 아빠가 말했다. "애린아 우리 그냥 둘이 죽을까?" 왈칵 눈물이 났지만 울 수 없었다. 잠이 들어 못 들은 척 했다. 나는 짐이 되는 존재구나,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제는 당시의 아빠 엄마가 얼마나 버거웠을까 생각하지만 그때는 서러움이 전부였다.
"서럽지만 눈물도 제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죠. 그때부터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어요. 방 청소를 하고 밥을 준비하며 쓸모 있는 딸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같이 죽자는 말을 다시는 듣지 않기 위해 제 쓸모를 증명하며 십대를 보냈죠." 학교와 소풍, 당연한 일상도 허락되지 않아
부모님은 일터를 서울로 옮겼다. 애린씨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생의 첫 수동휠체어가 생겼다.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휠체어가 생겼지만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쓸 일이 없었다. 2년 넘게 그 집에 살았지만 집 밖을 나간 건 딱 한 번뿐이다. 장애가 없는 동생은 마음껏 바깥나들이를 했다. 당연하듯 학교에 다니고 소풍을 갔다. 모두 애린씨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열다섯 살이 넘어 뒤늦게 사춘기가 왔어요. 우울했어요 모든 것이. 내가 왜 살아야 하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한창 예민할 시기에 제주도에서 저를 키워준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전 장례식도 못 갔죠. 집 밖에 혼자 나가본 적도 없는데 장례식장이 있는 제주도까지 어떻게 갈 수 있겠어요.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의 죽음도 함께하지 못한 거예요."서울에서 두 번째 이사를 하고 나서야 애린씨는 바깥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집 근처에 장애인 복지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복지관 선생님이 집에 들렀다. 선생님은 애린씨에게 바깥세상을 보여줬다.
근처 공원 한 바퀴를 도는 게 다였지만, 천천히 돌아본 바깥구경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애린씨에게 꽂혔다. 장애인을 처음 보는 것처럼 길을 가다 멈춰서 보고 가던 길을 돌아와 쳐다봤다. 애린씨는 그 이후로 몇 년간, 바깥을 나갈 때마다 모자를 푹 눌러썼다.
노들야학 거쳐, 02학번 문애린
복지관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며 초·중·고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할 수 있는 게 생겨 마냥 기뻤다.
"끝장을 보고 싶었어요. 드디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는데 이왕이면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가고 싶었죠. 집구석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대학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침 복지관에서 만난 사람 중에 노들장애인 야학에 다니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거다 싶었죠."노들장애인야학,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차단 받은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선물하는 공간이었다. 애린씨를 위한 곳이었다. 밖에 나가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싫었지만 공부에 대한 욕심이 더 컸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일주일에 세 번, 꼬박 1년 넘게 노들야학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잘못 왔나 싶었어요. 공부하러 왔는데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 가고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을 가는 거예요. 그때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막 시작되던 때였거든요. 공부가 먼저 아니냐는 주장과 우리들(장애인)의 현실도 알아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 논쟁이 활발했던 시기죠."노들야학은 수업만큼 집회에 참석할 일도 많았다. 애린씨는 자신이 집 안에 있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초·중·고에 다니지 못했던 것도 모두 '움직일 수 없었던' 문제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애린씨 자신이 겪은 문제였다.
애린씨는 야학 공부를 하며 집회를 다녔다. 수능을 두 번 봤지만 만족할 만한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적인 생활과 교육을 지향하는 대학'이 있다며 복지관이 한 대학을 소개했다. '02학번 문애린'의 생활이 시작됐다.
수업에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통역사가 있었다. 강의 내용을 수화로 전달하며 장애인의 교육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였다. 딱 거기까지였다. 애린씨가 입학한 실내디자인과에서 10명은 청각장애인, 10명은 비장애인이었다. 중증장애인은 애린씨가 유일했다.
"이런 어려움도 못 이겨내면 앞으로 사회생활 못해"
실내디자인은 몸을 쓰며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많았다. 조명과 의자, 천장 높이 등 전체를 설계하고 인테리어하는 학과였다. 과제 역시 이런 인테리어 작업이 많았다. 굽어진 팔과 다리는 애린씨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비장애인, 청각장애인과는 또 다른 몸의 한계가 있는데, 학교에서 이는 고려하지 않았다.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중증장애인인 내가 똑같은 기한에 과제를 제출하는 건 너무 힘들다고 했죠. 교수님은 단박에 '너의 개인사정은 봐줄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거였죠. 이런 어려움도 못 이겨내면 앞으로 사회생활 못한다는 충고도 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함께 교육한다는 대학에서도 제 장애는 개인이 견디고 이겨내야 할 몫이었어요."하루에 3~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던 대학 시절을 보냈다. 또 다른 감금 생활이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 머리를 박박 밀고 이를 악물었다. 기어이 졸업 작품을 내고 졸업을 했다. 졸업하고 나니 막막했다. 부모님은 은근히 공무원시험을 권했다.
공부는 싫었다. 노들야학에서 만나 영감님으로 부르던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노들센터에서 6개월간 실습해보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공무원시험보다 재밌어 보였다. 기자회견을 가고 집회도 참여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문서들을 만들었다. 장애인에게 발을 달라는 외침이 입에 붙을 무렵, 성북장애인자립지원센터(이하 성북센터)가 생겼다. 애린씨에게 첫 직장이 생겼다.
8년을 꼬박 성북센터에서 일했다. 애린씨는 주로 동료상담을 했다. 동료상담은 지역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을 돕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자립 생활을 하려는 장애인이 겪는 두려움과 막막함을 같이 견디고 지지하는 상담이다. 그러려면 참여자를 만나야 했다. 하지만 다들 밖으로 나오기 어려워했다. 성북구는 산동네였다. 오래된 건물과 언덕이 많은 동네였다. 애린씨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구석구석 언덕길을 오르내렸다.
당시 지하철 성신여대입구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리프트가 고장이라도 나는 날에는 다른 역에 내려 돌아가며 집마다 찾아갔다. 그렇게 성북구를 돌아다니며 장애인에게 이동권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왜 필요한지 설명했다.
그때 처음 애린씨도 자립을 결심해 실행했다. 서른 살이었다. 집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일단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했고 문턱이 높으면 안 됐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은 1층만 찾아다녔다. 문이 휠체어가 들어갈 정도로 넓어야 하는 것도 필수조건이었다. 어렵사리 찾은 집도 집주인이 장애인을 안 받아주려고 해 계약을 못 한 적도 있다.
"장애인 이동권 문제 해결, 너무 더뎌요"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보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요구하고 소리치는 게 더 좋았다. 감금 생활처럼 지냈던 시절의 한풀이를 하듯 밖을 쏘다녔다. 그동안 왜 세상 구경을 못 하고 살아야만 했는지, 집안에 갇혀 지내야 했는지 문제의 근원과 배경을 찾은 기분이었다. 집회 도중 경찰을 마주하면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늘 외쳐댔다.
성북센터를 거쳐 전장연 상근활동가로 일하며 애린씨의 활동 범위는 전국구로 넓어졌다. 인권, 장애인자립생활, 장애인 이동권 등 애린씨가 맡은 영역도 다양해졌다. 전국으로 강연을 다니기도 하는데 장애인 이동권에 여전히 발목을 잡힌다.
"사실 이동권 문제가 죽을 때까지 해결될 수 있을까 싶어요. 너무 더뎌요. 서울, 경기도 등 대도시만 벗어나면 정말 움직일 수가 없어요. 강원도, 충청도, 제주도 같은 곳은 힘들죠. 지역에 교육하러 가면 역이 있는 도시는 역까지 어떻게든 가는데, 역에서부터 강의 장소까지 갈 방법이 없어요. 장애인 콜택시는 두세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장애인저상버스도 없고요. 그래서 교육시간이 늦춰지는 경우도 많아요."장애인들의 활동과 이동이 좋아지지 않았냐고 하지만 대도시의 경우나 그렇다. 춘천에서 속초에서 논산에서 청주에서 휠체어로 이동하며 활동하는 장애인을 얼마나 마주할 수 있을까. 애린씨는 "산간지방, 지역으로 갈수록 장애인이 밖으로 나와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좋지 않다"라고 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무엇이 얼마나 변했을까. 전장연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전국에 있는 농어촌버스 1852대 가운데 휠체어가 접근해 탈 수 있는 버스는 한 대도 없다. 시외고속버스라고 다르지 않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 탈 수 있는 시외고속버스 역시 한 대도 없다. 애린씨가 2017년 추석,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농성을 이어간 이유다.
"인권활동가로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연휴까지 반납하는 전장연 활동가로 지낸 지 3년이 흘렀다. 애린씨는 전장연 활동가 중 유일한 장애인이다. 스스로 체력적 한계도 느끼고 있다.
"인권단체 어디든 그렇겠지만, 정말 할 일이 많은 조직이에요. 그래서 다른 활동가들은 자연스레 멀티플레어가 되죠. 밥을 먹으면서 자료를 훑어보고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처리해야만 해요. 그런데 제 몸은 점점 굳어져 가고 있어요. 근육이 굳어지며 통증과 디스크가 심해져요. 몸이 더디니까 일도 더뎌져요. 제 몫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생기죠. 내가 놓친 일들을 결국 다른 활동가가 챙겨야 하는데, 당연히 마음이 편하지 않고요."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 20여 년, 애린씨는 그 세월의 한풀이를 10여 년째 하고 있다. 더 이상은 애린씨처럼 집에만 있어야 하는 장애인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 사이 손이 굳어지고 목과 허리의 통증은 심각해지고 있다. 컴퓨터 자판을 치는 것도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는 것도 더뎌지는 것을 느낀다. 가끔 얼마나 더, 어떻게 이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지 스스로 되묻는다.
"언제까지 인권활동가로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요. 그런데 세상에 묻고 싶은 건 너무 많아요. 장애인은 왜 바깥 이동도 자유롭지 못하고 사회생활도 어려운 걸까, 이건 누구의 탓일까 묻고 싶어요.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학교 다니고 부딪히며 말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세상이 너무 더디게 변하는 것은 아닌가요?"애린씨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