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구매하기] '백발의 거리 투사' 백기완 선생님과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 공동 저자로 나서서 <두 어른>이란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책 수익금은 비정규노동자들이 '꿀잠'을 잘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데 보탭니다. 사전 구매하실 분은 기사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편집자말] |
백기완 선생이 충무로 입구에 벌여놓은 '백범사상연구소'는 우리 또래 친구들에게는 진작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60년대부터 70년대초에 이르기까지 백범사상연구소는 1964년 박정희 군사정부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나섰던 이른바 6.3 세대에게 일종의 연락처이자 모임 장소였다. 당시에 드나들던 친구들로는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부영, 허술 등이 있었고 나중에 문화운동 패와 문인들이 합류하게 된다.
나에게 백기완 선생을 소개한 사람이 김지하였는지 이부영이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무튼 소개를 받자마자 선생의 동원령이 내게 떨어졌다는 것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73년 종신 집권을 꿈꾸던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으며 일본에서 김대중을 납치해왔다. 대학가에서는 처음으로 유신반대 시위가 시작되었다.
백기완 선생은 호탕하다
"내일 종로 YMCA로 나오라우." 백기완 선생은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느닷없이 그렇게 지시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그와 약속한 장소로 나갔고 2층 회의실에는 백기완은 물론 장준하, 계훈제 선생 등이 계셨다. 그들은 성명서를 낭독했으며 나는 얼결에 장준하 선생이 주도하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의 발기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는 즉시 문인들에게도 전파되어 개헌청원에 뜻을 같이하는 문인 '61인 선언'이 이어지고 이는 '문인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당시에는 문인들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동아일보 기자들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준비되고 있을 무렵이어서 이부영과 나는 자주 만났고 위의 백범사상연구소를 드나들었다. 우리는 다른 재야 인사들과는 달리 허물없고 호탕한 백기완 선생의 술자리에 종종 참석하곤 했다.
그는 전통적 민중문화에 대한 식견이 넓고 깊어서 언제나 우리를 매료시켰다. 그의 입담은 대중강연 때의 지사적인 면모와는 달리 오히려 술자리에서 거침없이 이야기할 때에 빛이 났다. 그리고 언제나 이야기 속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우리 민족과 민중문화 특유의 정확한 알맹이가 들어 있었다. 백기완 특유의 풍부한 비유와 토속어와 흥은 그의 입담을 남에게 그대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호탕함이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우리들 사이에서는 '민중협객 방배추' 형님으로 알려진 방동규 선생이 해방 직후 청소년기에 백기완과 만나던 얘기가 기억난다. 당시 방동규 선생은 장안에 이길 자가 없다는 싸움꾼이었다고 한다. 팔순이 다 된 나이에도 지금도 철인3종 경기에 나갈 준비를 하는 이다. 서로 통성명을 하자마자 백기완이 방동규에게 물었다.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 한다면서?""남들에게 맞고 다니진 않는다.""싸우면 몇 놈이나 상대할 수 있나?" "뭐, 서너 명은 해치울 수 있지." 그랬더니 다짜고짜 백기완이 방의 뺨을 후려쳤다.
"임마, 사내자식이 수십만 명을 앞에 놓고 흔들어야지 고작 서너 명을 상대하는 게 자랑이냐? 너 앞으로는 나하고 아는 척도 하지 마라."뭐 이런 인간이 있나. 그 뒤 방 선생은 백기완 선생을 따라 '민중협객'의 길을 걸었다.
백기완 선생이 박정희 어깨 두드리며 한 말은?
또 생각나는 일화 하나. 백기완 선생이 농민운동을 하던 시기에 5.16이 일어났고 박정희가 대장 계급장을 스스로 달고 최고회의 의장을 하던 때였다.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와의 간담회에 '농민운동' 대장이었던 백기완도 초청을 받았다. 양복이 없어서 동료들이 남대문 시장에서 구해다 준 구제품 홈스펀 상의를 입고 갔는데 소매가 짧아서 와이셔츠 자락이 닷발이나 나왔다고 했다.
그런 뒤 박정희가 무슨 일로 청와대 뜰에서 만나자고 했다. 아버지뻘 되는 박정희에게 인삿말 첫마디가 "박형!" 그랬다고 한다. 이어서 "이 땅에서 혁명은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이지 내가 권력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곤 무슨 높은 자리를 준다고 하자 "박형, 나에게 당수자리를 주면 몰라도, 나는 봉황의 머리는 해도 꼬리는 안하는 사람"이라며 단박에 잘랐다고 한다. 어쨌든 청와대 뜰에서 얻어 마시고 온 양주는 도로 다 내놓고 간다며 박정희가 내준 관용차에다 그대로 다 쏟아내고 왔다는 일화도 있다. 이후 반 군사독재 투쟁의 전면에 나선 백기완은 박정희에겐 두고두고 눈엣가시였다.
나는 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 잊지 못할 줄거리가 있어서 『장길산』 연재를 시작할 때 에필로그에 쓰고 싶었다. '장산곶 매'라는 황해도 민담이었는데 백기완 선생은 할머니께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특히 매의 발목에 묶인 '매듭'에 주목했으니 그것이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제였다. 매듭은 백성들이 저희들 매라는 것을 표시하려는 정표로 묶어준 것이었고, 매는 외세인 수리와 더불어 싸우면서 또한 내부의 적인 구렁이와 싸우다가 매듭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매듭은 장수매의 장애물이면서 백성들과의 인연의 고리였던 것이다. 나는 유신헌법 반대로 백 선생이 투옥된 안양교도소에 면회를 갔다가 '장산곶 매'의 사용권을 허락 받았다. 나중에 마당극으로 개작하여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신 독재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인 1978년에 광주에서 김남주 시인 등과 '민중문화연구소' 개소식을 할 때도 백기완 선생과 함께했다. 그는 때로는 그림자 같은 계훈제 선생과, 때로는 장준하와 윤동주 시인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와 더불어 문인들의 시낭송회라든가 공연장 또는 농민,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함께 농성하고 함께 싸웠다.
고문에 '조선 범' 건강을 잃다
그가 1979년 11월 서울에서 이른바 'YWCA 위장결혼사건' 현장에서 체포당했을 때 나는 광주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YMCA에서 체포되어 보안사로 끌려갔다. 우리는 신군부에게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던 것이다. 광주에서는 체포 구금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서울에서는 전원이 체포되어 서빙고 보안사 조사실로 끌려가 이를테면 함석헌 선생은 수염을 뽑혔고 '목소리가 큰' 백기완 선생은 특별 대우로 모진 고문을 받았다.
젊은 활동가와 문인들도 당시의 고문이 무지막지했다는 것을 나중에 증언했고 특히 김병걸 평론가는 후유증으로 앓다가 작고했을 정도였다. 백기완 선생은 이때 모진 고문으로 조선의 범 같은 건강과 패기를 빼앗겼다. 우리는 그가 산야를 전전하며 긴 요양생활로 세월을 보낸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고 더 나이를 먹으면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일하는 노동자 농민과 사회적 약자가 생존권을 외치는 자리라면 어디에서든 우리는 여전히 백발이 성성한 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문정현 신부는 한결 같다
문정현 신부는 일찍이 인혁당 조작사건의 가족들이 김수환 추기경에게 와서 구명을 호소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민주화 인권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전북에서 5대째 내려오는 가톨릭 집안이었고 장남인 그를 비롯하여 아래로 남동생과 누이가 모두 신부 수녀가 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원주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가톨릭정의구현사제단'을 조직하여 공동대표가 되었다.
1975년 박정희 유신정권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무고한 지식인들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이튿날 전격적으로 형을 집행하고는 시신을 서대문 구치소에서 뒷문으로 빼돌리려고 했다. 이때 가족들과 함께 농성하던 문정현 신부가 시신을 운구하던 자동차를 가로막고 길바닥에 누웠고 차는 그대로 그의 다리를 짓밟고 지나갔다. 이후 그는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쓰는 5급 장애자가 되어 지팡이를 짚고 살아오고 있다.
그 당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나는 그의 이름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는 세 살 위인 형님 벌이었다. 나중에 광주에 내려간 뒤 윤한봉과 함께 그가 머물던 전북의 어느 시골 성당으로 찾아가 사귀게 되었다. 그는 유신 시절 내내 몇 번씩 투옥 되면서도 나오자마자 다시 투쟁 현장을 찾고는 했다. 전북에서 조작된 이광웅 시인 등의 오송회 사건에서도 문정현 신부는 그의 아우 문규현 신부와 함께 전면에 나서서 저항했다. 우리는 전남과 전북에서 늘 지척에 있었다.
거리의 예수
어쩌다 그에게 감사 인사라도 전하면 그는 늘 겸손하고 수줍은 태도로 '나는 별로 한 게 없다'고 부끄러워하곤 했다. 그는 언제나 핍박 받는 자나 사회적 약자들 곁에 머물렀고 한번 결정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투쟁했다.
그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심신을 다하여 실천한 사제였다. 그후로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이전반대 투쟁 때는 대추리 주민이 되어 살고, 용산참사 현장에서도 철거민들과 함께 고락을 함께 했다. 그런 '거리의 예수'가 몇이나 될까. 현재도 진행중인 그의 제주도 강정에서의 해군기지 반대운동은 끈질기고 외롭지만 젊은 사제 시절부터 평화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던 그의 종교적 신념을 평생 지켜온 실천이라고 나는 보았다.
수백 일을 철탑 위에서 농성 중이던 김진숙 노조 지도위원을 돕기 위한 희망버스에 탑승하여 부산에 갔다가 백기완 선생과 실로 십여 년 만에 재회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백발의 그가 오늘은 이 거리에서 또 내일은 다른 도시에서 노동자 농민들과 더불어 풍찬노숙하며 시위대의 전면에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책한다.
마치 모두 떠나간 고향을 지키고 섰는 동구 앞 느티나무를 바라볼 때처럼 고맙고 미안해한다.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겨울 인파 속에서 나는 문정현 신부의 손아래 동생 문규현 신부와 마주쳤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고 형님의 안부를 묻자 아우님은 빙긋이 웃으며 "늘 그렇잖아요?"라고 오히려 내게 반문했다. 서로가 잘 아는 문정현 신부의 근황인 것이다. 그는 아직도 어느 곳에선가 소수자들과 함께 있을 테니까. 나는 언젠가 어느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백기완 선생이나 문정현 신부처럼 길에서 살 자신은 없고, 글을 써서 누군가의 편을 들어줄 수는 있겠다.' 그런 두 분의 대담집이 '두 어른'이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서 묶여 나온다고 하니 기쁘기도 하고 우리가 함께 헤쳐 온 시절들에 대한 감회가 새롭다. 역사적인 책으로 모두가 한 권씩은 소장해 보아야 할 귀한 책이다. 더더욱 모든 수익금을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을 짓는 기금으로 내주겠다 하니 정말 '어른'에 값한다. 나 또한 작은 마음을 얹으려 하니 많은 이들이 동참해 주길 바래본다.
*대담집 <두 어른>의 사전판매(1쇄) 전액은 꿀잠 기금에 보태 빚을 갚는 데 사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