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새해가 밝자 전두환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작년에는 많은 시련이 우리를 괴롭게 했으나, 우리는 민족의 위대한 저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착실한 전진을 이룩해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시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가장 직접적으로는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일 것이다. 그 전해인 1983년 10월 9일, 버마를 방문 중이던 그가 수행원들과 아웅산 장군 묘소를 참배하던 중, 나중에 북한인으로 밝혀진 테러범들이 설치한 폭탄이 터져 비서실장과 장관들을 비롯해 17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던 것. 이보다 한 달 쯤 전에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상공을 지나던 중 소련이 발사한 미사일을 맞아 추락해 탑승객 269명 전원이 사망하는 전대미문의 사고도 있었다. 전두환에게는 글자 그대로 시련의 한 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언론에 노출된 사건보다 더 큰 시련이 전두환에게는 있었다. 정치활동 금지로 꽁꽁 묶어둔 김영삼이 급기야 단식투쟁으로 항거했고, 그 사실이 언론에는 '현안 문제'라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사건으로만 보도되었지만, 사람들의 귀에서 귀로 구전되면서 정말로 전두환에게 '현안'이 되어갔다.
더욱 큰 시련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반정부투쟁이 끊이지 않고 불타올랐던 것. 이것이야말로 전두환에게 진짜 시련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모종의 유화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연말에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학생들에 대한 전면 복학 조치를 내놓기에 이르렀던 터였다.
'유화국면'과 복학투쟁운동권의 처지에서도 1984년은 연말에 발표된 복학조치가 초래한 논란으로 뜨겁게 시작되었다. 운동권에서는 제적생 복학조치를 '유화조치'로 불렀고, 5공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정세를 '유화국면'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궁지에 몰린 5공이 운동세력에게 숨통을 트여 줌으로서 저항의 기세를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심산에서 나온 고육책이라는 판단이었다.
따라서 1984년이 밝아오자, 학생운동 출신자들로 구성된 민청련 안에서는 복학 조치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다. 민청련이 대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내부에서의 논쟁은 엄청난 열기를 토해냈다.
복학 거부론의 기본 논지는 이 조치가 기본적으로 5공의 수명 연장을 위한 기만적인 제스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가장 선명하게 밀고나간 민청련 간부로는 기대(기별대표) 모임을 이끌던 이범영을 꼽을 수 있다.
이범영은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굵지만 윤기있는 목소리로 정세에 대해 또한 활동방향에 대해 조리있게 설명하곤 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노가리'였다. 그는 매월 1회의 정기 기대 모임을 소집하고 공개된 집행부의 활동에 대한 보고와 정세에 대한 토론을 주재했다. 또한 각 기별 모임에서 제기된 의견과 기별 모임에서 거둔 회비를 집행부에 전달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1984년 초의 기대 모임에서는 복학 문제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범영은 복학 거부론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는 기대 모임에서 이런 취지로 말했다.
"저들이 던져주는 떡고물을 왜 받아먹어야 하는가. 한 번 뒤로 물러서면 자꾸 물러서게 된다. 복학을 해서 학교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계속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복학한 이들을 통제하고 지휘할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복학은 우리 운동력의 손실만 초래할 것이다." 열혈 투쟁가였던 이범영은 안타깝게도 1994년 담도암으로 40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에 반해 복학 수용론은 상대적으로 젊은 층에서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서울대의 경우 78학번들(민청련 출범 당시 78학번은 가장 어린 막내세대였다) 사이에 수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이 대표적이었다.
수용론의 논지는 이 복학 조치 자체는 운동의 힘으로 5공을 압박해 쟁취한 성격이 있으므로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결코 투항이 아니며 학교라는 투쟁의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5공에 굴복해서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싸우러 들어가는 거다. 80년 5․17 때 감옥에 가지 않고 군대에 간 것이 늘 부담이 됐었다. 이번엔 감옥 가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겠다."실제로 그는 복학했고, 복학생협의회를 이끌며 학생운동의 대열에 섰다. 그해 가을에 서울대 안에서 이른바 '학내 프락치 사건'이 일어났고 그는 기꺼이 그 책임자의 일을 떠맡았다. 그리고 그 일로 감옥에 갔으니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킨 셈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읽혀지는 명문장이 되었다.
어쨌든 논쟁은 뜨거웠지만, 민청련은 복학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민청련이 각 대학 학생운동의 연합체인 점에서 어느 한 쪽을 두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보다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에 집중하기로 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녹화사업 공작이때 민청련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이른바 '강제 징집'과 '녹화 사업'이었다.
강제 징집이란 1979년 무렵부터 각 대학이 학칙에 총장의 권한으로 일방적으로 휴학을 명령할 수 있게 한 제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휴학을 '지도 휴학'이라고 불렀다. 지도 휴학의 요건은 학칙 상으로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유'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표현돼 있지만 사실상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학교로부터 강제적으로 격리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의 남자 대학생들은 학사를 이유로 병역을 연기하고 있었으므로 지도 휴학을 당하면 군 입대 연기가 취소되고 곧바로 입대영장이 발부됐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도휴학 제도는 1980년 전두환 정권에도 이어져 1980년 5·17 계엄포고령 이후 수많은 학생운동 관련자들이 이 제도에 의해 본인의 뜻에 의하지 않은 군 입대를 강요당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지도휴학 제도의 절차적 요건조차 무시하고,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단순가담자를 연행한 상태에서 지도휴학과 징집을 단 하루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곧바로 군에 입대 조치했다.
따라서 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사라지고, 며칠 뒤 군에 입대했다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 깜작 놀란 가족에게 학교 당국과 경찰은 구속되는 것보다 군에 입대하는 것이 일신상 좋은 것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그렇게 군에 입대하게 된 당사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단순한 군 병영생활이 아니었다. 보안사는 이렇게 강제 징집된 자들을 '특별관리'하여 마치 형사 피의자인 것처럼 불러서 조사를 하고, 학생운동에 관한 정보를 진술하도록 강요했다. 보안사는 이를 '녹화사업'이라고 불렀는데, 좌익사상으로 빨갛게 물든 머리를 녹색으로 바꾸는 작업이라는 뜻이었다.
녹화사업은 법률에 의하지 않은 정책임은 물론 오히려 헌법과 법률을 정면으로 위반한 불법행위였으나,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군 부대 안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보안사는 학생운동 관련 군 복무자들에게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한편 휴가를 주어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를 방문하고 선후배들을 만나 학생운동 동향을 파악한 뒤 보고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녹화사업은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한 상처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결국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죽었다는 황망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에게 전달된 사인은 한결같이 '신병을 비관한 자살'이었다. 가족들은 자살할 이유도 없고, 심지어 유서도 남기지 않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들의 호소는 언론을 통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학생운동가들 사이에서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이렇게 소문으로만 떠돌던 녹화사업과 그로 말미암은 의문사 사건이 복학조치를 계기로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들에 의해 최초로 공론의 장으로 떠올랐다. 1984년 2월 20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과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가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진정한 복교를 위한 공개간담회'를 주최하려고 했으나 당국의 압력을 받은 기독교 측은 장소 대여를 거부했다. 그러자 140여 명의 복학생들이 그 장소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그들이 내세운 구호 중에 "강제징집 철폐"와 "의문사 진상규명"이 들어 있었다.
선도투쟁의 모범을 보이다이러한 소식을 접한 민청련은 곧바로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기로 했다. 그래서 기독교 청년단체들과 함께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준비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을 이끈 이는 서울대 사범대 76학번 이원주였다. 그 자신이 5·17계엄 조치 이후 강제징집으로 군에 입대당해 '녹화사업'을 받은 당사자였다.
이원주는 민청련 활동 이후 인천민주노동자연맹 창립에 참여하는 등 평생 진보정치를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말년엔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던 중 2016년 11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원주는 1984년의 준비모임을 통해 그동안 입으로만 전해지던 녹화사업과 의문사의 진상을 담은 '강제징집 문제 공동조사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도휴학과 강제징집은 법률상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들에게까지 마구잡이로 시행되었다. 시위 현장에서 단순 가담자로 연행된 학생, 뚜렷한 혐의 없이 '문제 학생'으로 지목된 자, 공단 부근에서 야학 강사를 하던 대학생 등이 주된 대상이었다. 그들을 불법으로 연행하여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 본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강압적으로 자원입대동의서에 서명하게 했다. 그리고 병역법상 정상적 절차 없이, 가족 면회도 없이 수사기관에서 곧바로 군부대로 징집 처리했다.
그들 중에는 신장 및 체중이 규정에 미달하거나 시력이 극도로 미약하여 징집 대상이 안 되는 자가 있었고, 심지어 나이가 아직 징집 대상에 못 미친 자도 있었고, 간질, 늑막염, 축농증, 소아마비 등 징집에서 제외될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자들도 포함됐다. 2대 독자 및 3대 독자로 징집 면제가 될 이들도 있었다.
'보고서'는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특히 정치권은 국민의 생명이 걸린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어 야당인 민한당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해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준비모임'은 정식으로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더욱 광범위한 조사활동과 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때 강제징집돼 '녹화사업'의 대상이 된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한 6명의 신원과 죽음을 앞둔 행적을 조사하여 최초로 공개했다. 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서울대 기계설계과 한희철, 동국대학교 사대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죽음이 있기 전 그 어떤 자살의 조짐이나 동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그리고 의문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군은 일종의 불가침 영역이었고, 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보안사 분실 같은 곳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정치권의 야당은 물론 어떤 사회단체도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청련이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었다.
공대위에 참여한 단체가 민청련 이외에는 모두 기독교와 가톨릭 교단에 속한 청년 단체였던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종교를 배경으로 삼지 않고서는 제기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의 배경이 없는 민청련은 정보기관에게 눈엣가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청련은 강제징집 문제를 선도적으로 제기함으로써 자칫 학생운동이 복학 문제를 두고 관념적인 논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당면 투쟁을 통해 운동 대열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