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비행기와 자동차로 33시간을 꼬박 달려 탄자니아의 '모시'라는 도시까지 우리를 이끈건, '산' 자체이기도 했지만,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85년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수많은 밤에 술병과 함께 쓰러지며 불렀던 우리들의 18번이었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 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목이 찢어져라 그 노래를 불러댄 시절, 우리는 하이에나들이었다. 고고한 자태의 표범이고 싶었으나 일상은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연애도, 공부도 어느 것 하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 없고 가난한, 80년대의 초라한 청춘들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을 지나 중년에서 초로의 사나이들은 조용필이 남겨준 임무를 완수하고자, 아프리카를 향해 먼 길을 떠나왔다.
이 노래의 원작소설인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
"마사이 족은 킬리만자로의 서쪽 봉우리를 '응가예 응가이' 즉 '신의 집'이라고 불렀다. 서쪽 정상 부근에는 표범의 사체가 말라붙어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9명의 사나이들은 표범의 발톱조각이라도 발견할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킬리만자로를 간다고 하니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농반진반 표범 존재의 확인을 주문했고, 본인들 또한 혹시나 표범의 작은 흔적이나, 이야기라도 얻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 듯했다.
오래된 허구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가족과의 약속에 따라 인조 표범가죽을 둘러쓰고, 스스로 표범이 되어 정상까지 오름으로써 사실임을 증명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쨌건 무수한 기대와 설렘 속에 속칭 '이 작가'로 불린 '나'와 친구인 치과의사 임 원장, 장흥에서 양식업 하는 홍 반장, 그리고 선배인 정 변호사는 모두 광주에서 출발했다. 또 부산에서 오신 분위기 메이커 '우짜노 김 선생', 항상 아재개그로 좌중을 웃겨줄 만반의 준비태세인 예비군 중대장 출신 '홍 선생'. 서울에서 오신 사진작가이자 회계사이신 신사 '조 선생', 보디빌더처럼 덩치가 좋은, 숨은 재주꾼 '서초동 임 선생'.
거기에 촌철살인의 도인이신 경남 함양에서 온 '양 선생'까지 일행은 9명이었고, 우리를 이끈 등반대장은 이번 킬리만자로 도전이 29번째라는 전설의 사나이 OO여행사 박 이사였다.
박 이사는 나의 친구들보다 한참 연로해 보였으나, 그것은 모발의 개체수가 적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을 뿐, 기실은 친구들보다 고작 2살 많은 젊은이였고, 성우 뺨치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음성의 소유자다. 그런데 29번을 킬리만자로에 오르면 '소는 누가 키우고, 가정은 누가 지킬까'하는 걱정이 떠올랐으나 돌아오는 날까지 차마 그 질문을 던지진 못했다.
산행 첫째 날 - 마랑구게이트에서 만다라 산장까지산에 오르기 전 머문 탄자니아의 모시로부터 케냐의 나이로비까지 대부분의 지역들은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지에 있었다. 적도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고도는 선선한 날씨를 선물했고, 간혹 모기들이 보였으나 녀석들의 비행실력은 술에 취한 듯 형편 없었다. 식자우환이라고, 말라리아에 대한 과도한 지식이 우리를 잠시 우리를 괴롭혔을까, 모기 녀석들은 실질적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마랑구 게이트로 향했다. 성수기를 막 지난 시기여서 여행객들이 그리 많지 않아 수속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게이트 통과를 기다리는 등반객들의 대화 속에는 영어, 독일어, 스와힐리어 등 각국의 언어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역시 수속을 맡은 관리들의 표정은 딱딱하고 권위적이어서 시험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보면 대한민국이 젤 나아~.
걔중에 특별히 독일인들이 많았는데, 역시나 알고보니 탄자니아는 과거 독일의 식민지였다. 게이트 옆에는 1889년 독일 지리학자 한스 마이어가 최초로 킬리만자로 정상을 올랐다는 기념비와, 바로 옆엔 함께 오른 현지 가이드와 포터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까지 있었다.
원래 킬리만자로는 영국령 케냐 땅이었는데, 한스 마이어가 오른 산이 아프리카 최고봉이라는 것을 보고 받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외할머니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독일령 탄자니아로 넘겨 달라고 요청했고, 외할머니는 손자에게 생일선물로 킬리만자로를 줬단다.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유럽 제국들의 아프리카 식민지배는 아프리카 대륙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상아해안, 황금해안, 노예해안이 있는데 명칭 그대로 폭력과 수탈의 의미를 담고 있다.
19세기 영국은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침략정책을, 프랑스는 횡단정책으로 맞붙어 교차지점에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경선이 자를 대고 그은 듯 반듯한 이유다. 지금의 구미열강들이 뽐내는 부와 힘의 자산은 당시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중남미를 수탈한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제국주의 침략자들 또한 모두 아프리카인의 후예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호모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까지 모두 아프리카에서 발원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프리카 동부에 깊게 패인 골짜기인 6,400km의 동아프리카 지구대를 따라 인류가 생겨났고, 이 거대한 골짜기를 따라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동했다. 인류는 모두 아프리카인의 후손이고 아프리카에 빚진 셈이다.
아프리카는 인류 공통의 조상님의 땅이다. 그런데 고향의 기억을 잃은 후예들이 돌아와 선조들의 땅에 남아 있던 후손들을 노예로 잡아다 팔고 죽이고 수탈했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1000만명 이상이 노예로 팔려갔다. 유럽인들은 강을 따라 보트를 타고 올라가며 강가에 구경나온 원주민들을 사파리하듯 재미삼아 총으로 사살하기도 했다. 총의 존재를 모르던 그들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갔다.
마랑구 게이트를 통과하기에 앞서 현지 가이드 대장 실바노를 포함한 가이드, 포터, 요리사 등 28명의 현지인 스태프가 소개됐다. 조상님들의 근친 답게 모두 잘 생겼고, 똑똑해 보였다. 우리와 전 일정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우리의 목숨을 지켜줄 전문가들이었다. 박 이사를 포함한 10인의 원정대는 스틱을 가운데 모으고 파이팅을 외쳤다. 정상에 오를 꿈에 사기는 충천했으나, 머지않아 다가올 고통은 미처 알지 못했다.
마랑구게이트는 1,970m로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의 1,947m보다 23m 높다. 산에서 첫 밤을 보낼 만다라 산장은 2,720m로 750m의 고도를 오르는 코스였다. 날씨는 선선했지만 숲은 열대우림이었다. 특히 현지인들이 '노인의 수염'이라 부르는 이끼들이 숲 전체를 덮고 있어서 타잔이 곧 덩굴을 잡고 나무 사이로 소리를 지르며 날아올 분위기였다.
고도가 그리 높지 않은데도 현지 가이드와 박 이사는 끊임없이 '천천히'를 주문했다. 현지어로는 뽈레뽈레~. 호흡이 가쁘지 않도록 하는 것 말고 고산을 오르는 방법에 왕도는 없다는 것이다. 여행사의 안내서에는 운 좋으면 카멜레온이나 원숭이를 볼 수 있다 했는데, 우리를 마중나온 녀석들은 없었다. 우리가 한반도에서 이리 먼길을 왔는데 인사도 없단 말인가.
등산로변에 설치되어 있는 간이식탁에서 점심을 먹었다. 산행의 전 과정에 비슷한 도시락이 제공되었다. 닭튀김, 샌드위치, 계란, 음료수 등 푸짐하고 맛있는 식단이었다. 남기지 않고 다 먹으면 과식이었다. 총 4시간여를 걸려 만다라 산장에 도착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온 각국의 여행객들이 짐을 풀고 있었다. 첫날 산행은 가벼운 몸풀기 수준이었다.
숙소 주변의 숲에서 꽥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위에서 원숭이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킬리만자로에서만 산다는 꼬리가 길고 흰 칼리바스 원숭이다. 동물원에서 만난 것 말고 자연상태의 원숭이는 처음이었다. 아! 그들도 우리의 조상님 아닌가. 왜 그들은 아직도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가. 인간으로 진화한 조상님들에 비해서 진화의 압력이 약했던 때문이다. 그렇다면 쫌 덜 고생한 셈이군. 진화를 대입하지 않으면 사고가 작동되지 않는 고약한 버릇이 이곳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산행기간 내내 세숫물은 딱 한주먹이다. 머리도 안 감고 어찌 자냐며, 깔끔한 정 변호사는 고통스러워 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호텔도 아니고 포터들이 지고 오는 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니 불편을 감내해야만 한다.
도착하자마자 가이드와 요리사들이 커피, 홍차, 밀크티를 내온다. 황송하다. 차들의 맛이 훌륭하다. 그도 그럴 것이 케냐와 탄자니아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커피와 홍차의 산지 아닌가.
저녁식사도 훌륭했다. 정성들여 공수해 온 깻잎에 볶은김치, 김, 젓갈 등 한식과 현지식 모두 맛있었다. 해외에 가서도 워낙 가리지 않고 음식을 잘 먹는 편이긴 하나 다른 분들도 대부분 흡족한 표정들이었다. 컨디션 조절을 위해 금주를 권하니 소주가 빠져서 아쉬운 분들은, 따로 꼬불쳐 온 술들로 한잔씩들 하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수만키로의 시공간을 이동해 킬리만자로의 숲속에서 잠드는 경이로운 밤이었다. 원숭이들과 알지 못할 짐승들의 울음소리, 서걱거리는 나뭇잎들의 속삭임으로 숲은 밤새 뒤척였다. 설렘과 두려움에 나도 숲과 함께 깊이 잠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