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군말] 역사를 위해서 |
나는 왜 이 기사를 연재할까? 좀 주제넘은 말이지만 '역사를 위해서'다. 나는 인터넷상에서 애초부터 별칭을 '사마천'으로 쓰고 있다. 사마천은 중국 진한시대에 <사기>(史記)를 쓴 역사가로,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남자로서 가장 치욕적인 궁형(宮刑, 생식기를 제거당한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감히 그분의 존함을 쓰는 것은 사마천의 그 정신을 따르고자 함이고, 그런 형벌을 각오하면서 글을 쓰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나는 이제까지도 그런 각오로 글을 써왔지만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글을 쓸 것이다. 그 까닭은 다음 한 마디 때문이다.
'역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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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미사학자와 만남2003년 4월 하순, 그때 나는 <오마이뉴스>에 항일유적답사기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라는 안중근 의사 행적편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 얼마 전 나는 경북 안동 임청각 후손 이항증 선생과 독립운동가 일송(김동삼 선생) 후손 김중생 선생의 알뜰한 안내로 중국 대륙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바 있었다. 1999년 8월 4일 하얼빈에서는 현지 동포사학자 서명훈 선생의 안내로 안중근 의사 의거지인 하얼빈역 플랫폼 현장에서 9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에 일어난 상황을 자세히 기사화했다.
그 기사가 나간 지 얼마 후 내 메일함으로 자신을 재미동포 '이도영'이라고 소개한 한 사람이 서명훈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영문을 묻자 그는 일제강점기 때 하얼빈에 살았던 한 동포의 이력을 알고 싶어 그런다고 답했다. 그래서 서명훈 선생의 전화번호를 알려드렸다.
그 모든 일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는데 2003년 11월 백범 암살 진상규명을 위한 모금 중에 이도영 박사가 자진해서 도움을 주겠다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영어도 모르는 데다가 미국현지 사정은 까막눈인 나는 백만 원군을 얻은 마음으로 기꺼이 수락했고, 그래서 이도영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됐다.
나는 미국의 한 숙소에서 한밤중 옆 침대에서 제주도 섬 소년 이도영이 민간인 학살자 추적자가 된 아프고도 기구한 사연을 들었다. 한국전쟁 발발 50여 일 후인 1950년 8월 20일, 남제주군 대정면 서기였던 소년 이도영의 아버지가 한밤중 경찰에게 연행돼 마을주민 250여 명과 함께 모슬포 주둔 군인들에게 총살, 암매장됐다는 이야기였다.
소년 이도영은 그 사연을 나중에 알고 농사꾼이 되라는 할아버지의 엄명도 거부한 채, 국립 대학교에 진학했다. 후일 그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드리고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언저리를 맴돌며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진상을 규명하고 있다고 했다. 그제야 그는 나를 통해 알고자 했던 '하얼빈 출신의 한 동포'가 아버지를 처형한 군 부대장 김아무개 예비역 장군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백범 암살 진상규명팀의 지도위원으로 자료 검색에 많은 도움을 줬고, 나는 그의 안내로 맥아더기념관도 답사할 수 있었다. 그는 1차 방문 때 나와 헤어지기 직전 두툼한 봉투와 CD 한 장을 전했다.
그 봉투 안에 든 것은 '말할 수 없었던 한반도 전쟁'이라는 출력 원고였고, 그 CD에는 서울근교 좌익사범, 대구근교 부역자, 대전형무소 정치범 등의 처형장면 사진이었다(출력 원고는 출판을 의뢰했지만 아직도 내 서가에 잠자고 있다). 2012년 나는 재미동포 김수복씨를 통해 이도영 박사가 미국 현지에서 운명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나는 그분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게 내내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다.
앞의 두 처형 장면은 <오마이뉴스> 2017년 10월 16일 "그 여인이 없었다면 '대통령 박정희'도 없었다" 기사와 2017년 6월 14일 "'골로 간다'의 어원,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다" 기사에 모두 공개한 바 있다. 이번 회 기사에는 그분이 내게 제공한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장면을 수록한다.
이 자료 영문 설명에는 처형자를 '정치범(political prisoner)'이라고 돼 있지만, 기자의 판단으로는 그때 처형자 대부분이 당시 보도연맹 가입자로 보인다. 그들 모두(대전형무소 처형자 1800명)가 골수 공산주의자였는지는 역사가들이 밝혀야 할 숙제다.
*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장면 사진이 그동안 한두 장면은 언론에 공개된 바는 있으나, 처형 전 과정 열여덟 장면이 언론에 생생히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아래부터 학살 장면이 나오니 심약자는 주의하시길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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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도연맹(사건)이란? :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덧붙이는 글 | 여기 수록된 사진자료들은 박도 엮음 눈빛출판사 간행 <한국전쟁 Ⅱ>에도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