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24주년 기념식 소동 2차 총회를 통해 조직을 강화한 민청련은 공개 정치투쟁체라는 자기인식을 대외적으로 표출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4월 19일 수유리 4·19묘역에서 열린 '4·19 24주년 기념식'이었다.
이전까지 4·19 기념식은 정부의 공식행사로 치러져 왔다. 1984년 4월 19일 오전에도 수유리 묘지에서 정부 요인과 희생자유족회 등이 참석한 가운데 '4·19의거 제24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4·19가 '의거'를 벗고 1960년 당시의 이름인 '혁명'을 되찾은 것은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였다.
그날, 정부 요인이라고 하지만 대통령과 총리는 물론 기념사를 쓴 부총리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이 4·19를 얼마나 낮춰 보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행태였다. 신병현 부총리의 기념사는 조철권 원호처장이 대신 낭독했다. 그 내용도 4·19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서 "4·19정신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 주제였다.
민청련은 관에서 거행하는 형식적인 기념식과는 별도로 민주세력이 4·19의 본래 정신을 기리는 제대로 된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정부 행사가 끝난 뒤인 오후 2시에 별도로 '4·19 24주년 기념식'을 갖고 묘지를 참배했다.
이때 많은 사복 경찰과 정보기관원들이 둘러싸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참배를 마치고 해산하는 길에 경찰이 박우섭 총무부장을 검문 검색하려고 했으나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경찰은 박우섭을 강제 연행했고, 그에 대해 민청련 회원 50여 명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경찰은 회원들을 집단적으로 구타하며 20여 명을 연행했다. 그 과정에서 장영달 부의장, 박계동 홍보부장, 연성수 사회부장 등 간부와 회원 오경렬, 예병남, 김종환, 김진의 등 수십 명이 부상당했고, 특히 장영달 부의장과 오경렬 회원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부상을 당했다. 연행된 집행부 상당수는 구류 처분을 받았다.
사실 경찰의 이러한 폭압적인 행태는 당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민청련은 그것을 의례적인 일로 방치해서 안 된다고 판단했다. 바로 다음 날인 4월 20일, 내외신 기자들을 불러 놓고 '죽음에 죽음이 꼬리를 물고, 폭력에 폭력이 온 사회에 넘쳐흐르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4·19묘지에 배치되었던 사복경찰 및 병력 지휘자의 신원을 밝히고 처벌할 것과 내a무부장관 및 치안본부장이 이 사태에 대해 국민과 민청련에 대해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기본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한편 이날 기념식에서 민청련은 며칠 전 2차 총회에서 결의한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우리 사회는 대외적인 예속과 대내적인 독점으로 인해 크게 일그러져 있다"고 보고, 그로 말미암아 "불평등의 심화로 민중생활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를 조성하고 있는 주체는 '군사독재정권'이며 또한 그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미국'이라고 규정했다.
그 다음에 투쟁방향을 제사할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 동안 복학조치에 대해 침묵하던 민청련이 비로소 그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정권이 복학 허용 등 일련의 '화합조치'를 편 것에 대한 민청련의 시각은 이러했다.
정권이 유화국면을 조성한 배경은 "첫째 한국을 장기적으로 안정된 시장으로 남겨두기 위해서 극단적인 독재정치로 인해 야기될지 모르는 혼란이나 파국을 막아보려는 외세의 압력, 둘째 교황 방문 등을 앞두고 이제까지 실추된 대외적인 체면을 되찾으려는 전두환 정권의 궁여지책, 셋째 폭력을 통해 집권한 정권에 치명적으로 부족한 국민적 지지기반과 정통성을, 총선을 앞두고 조금이나마 회복하려는 화해 제스처, 넷째 권력 내부 강경파의 무차별한 탄압책만으로는 민주화운동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온건파 의견의 득세 등"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운동권 안에서 유화국면의 배경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들을 총정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투쟁방향을 정함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공간을 이용하여 그동안 흩어져 있던 역량들을 결집시켜 내부 조직 역량을 강화시키자고 호소했다. 구체적으로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와 제적생복교대책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해직기자협의회, 노동자복지협의회 등의 결성을 그 사례로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성화된 부문운동역량을 연대의 틀로 묶어 일종의 '전선'을 형성할 것을 주문했다. 이것은 이후 민청련 활동의 주된 방향이 된다.
햇볕에 드러낸 '광주'4·19집회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민청련은 보다 과감한 집회 개최에 나선다. 당시까지 그 어느 단체도 공개적으로 열지 못했던 광주항쟁 기념식을 갖기로 한 것. 민청련은 집회 장소로 광주 현장 그것도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묘역으로 정했다.
1984년 5월 14일, 오후 2시경 광주항쟁 희생자 127분을 모신 망월동 묘역을 찾아 추모식을 거행하고 참배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근태 의장은 '광주여,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라는 제목의 광주항쟁 4주년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리고 참배자 일동은 4년 전 민주항쟁의 현장이었던 금남로를 따라 연도의 시민들이 숙연히 지켜보는 가운데 '오월의 노래'를 부르며 가두행진을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도청 앞 광장 분수대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고 이날의 행사를 마쳤다.
경찰이 불법집회 및 시위라며 강제 연행을 한다고 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 만큼 회원들은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경찰도 뜻밖의 행진에 당황했는지 감시만 할뿐 연행은 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은 서울에서 찾아와 공개적으로 추모 행사를 가져준 데 대해 감사했지만, 누구보다도 뿌듯해 했던 이들은 가두 행진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한 민청련 회원들 자신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민청련은 5월 19일에는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5월과 민족의 혼'이란 주제를 가지고 1000여 명의 재야민주인사, 해직언론인, 해고노동자, 해직교수, 학생 및 기타 많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집회를 가졌다. 이를 통해 지난 4년 동안 음지에 가려져 있던 광주 항쟁이 대중이 모인 광장에 등장했다. 민청련은 광주항쟁 이후의 폭압적인 분위기를 뚫고 스스로 공개단체로 나선 데 그치지 않고, 광주항쟁도 공개적인 행사의 장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행사가 끝날 무렵 흥사단 주변은 전경과 사복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집회 참석자들이 그대로 길거리로 나섰다가는 충돌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집행부는 이날은 일단 집회 자체를 성사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으므로 경찰 측과 대화를 통해 참석자들이 시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안전한 귀가와 검문 및 검색을 안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의 약속을 받고 귀가하던 50여 명의 참석자들은 결국 이화동 4거리에서 이들을 연행하려던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 측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하고 회원 김재황 등 5명이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회원 서원기 등 10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날 경찰의 폭행으로 인해 여성회원 이경은이 임신 6개월의 태아를 사산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다. 민청련 집행부는 즉각 성명서를 내고 폭행자 처벌과 정부 당국의 공개 사과를 촉구했다.
그러나 폭행 당사자인 동대문경찰서 측은 책임이 없다며 발뺌했다. 그러자 이경은 서원기 부부는 직접 펜으로 쓴 '동대문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딸을 잃어버린 죄 많은 부부가 각계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을 쓰고 복사해서 직접 거리에서 배포했다. 당국으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없었지만, 민청련 회원들은 이러한 헌법상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주장과 호소를 통해 국민 대중들이 정권의 폭력성을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가두시위 촉발한 8·15기념식민청련의 집회 활동은 8·15기념식으로 연결되었다. 이 역시 정부 주관의 광복절 행사가 치러지는 것이 관례였지만 민청련은 그것과 별도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명칭도 광복절이 아니라 '민족해방 39주년 기념식'이었다. 장소는 종로2가의 탑골공원으로 하고 시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오후 5시로 했다.
특히 이때는 전두환 대통령의 9월 6일 일본 방문을 앞두고 정부의 친일 외교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이 '전후 한일관계의 청산'을 마무리하고 '한일 신시대의 개막'을 여는 의미가 있다며 홍보했다.
하지만 민청련은 그것은 허위이며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재침략을 연상시키는 위험한 발언이 일어나는 시점에 전두환이 방문하는 것은 곧 일본의 정적 군사적 의도를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굳이 방일을 강행하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이 외교적 성과를 과시함으로써 정통성 논란을 잠재우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민청련의 8·15행사는 자연스럽게 전두환 방일 반대투쟁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러한 민청련의 의도를 간파한 정부는 8월 15일이 되자 버스 15대로 탑골공원을 에워싸고 전경과 사복경찰로 탑골공원을 봉쇄하여 기념식을 막았다.
민청련 집행부는 이러한 경찰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극기를 들고, 플래카드를 앞세워 탑골공원 진입을 시도했다. 결국 집행부는 경찰의 무차별 폭행과 구타를 당하며 연행됐다. 그러자 집회 참석을 위해 모여든 회원들과 대학생들 약 3천여 명은 가두에서 항의 시위를 펼쳤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했고, 시위대는 흩어져서 종로 3가, 회현동 신세계 앞, 제기동, 청량리 등을 돌며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여나갔다. 시위대는 주로 전두환의 '매국적 방일 결사반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시위로 민청련 간부 및 회원 30여 명과 대학생 1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구류 처분이라는 새로운 탄압제39주년 8·15 민족해방 기념식' 행사를 성사시키는 데 실패한 집행부는 8월 18일 실내인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다시 개최했다. 약 6백여 명의 회원, 대학생, 민주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기념식은 정부가 주관하는 여느 8·15행사와는 다르게 기념사, 해방가 제창, 일제 강점기 증언, 1964년 6·3한일회담반대투쟁 증언, 오늘의 한일관계에 대한 강연, 8월 15일 기념식 경과보고, 메시지 채택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기념사는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8·15해방 3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 내용은 "해방은 다시 이룩해야 할 우리의 목표로서, 첫째 신식민주의 세력과 이에 유착한 집단의 수탈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둘째 통일된 조국을 향한 해방, 셋째 민중의 자기 인식과 실천을 기축으로 여기에 양심적 제 지원 세력의 헌신을 더한 전 민중에 의한 해방"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이강훈 선생이 참석하여 "아직도 우리나라의 독립은 이룩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살길은 자주적인 국가와 완전한 통일에 있다"고 일갈했다. 6·3세대인 성유보 동아투위위원장은 "전두환씨의 일본 방문은 새로운 군국주의의 부활을 기정사실화시킬 수 있다"며 경고했다.
이러한 민청련의 과감한 집회 개최와 정부 비판 발언에 대해 전두환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판단한듯하다. 8·15 광복절과 같은 일반적인 행사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처벌하는 것은 자칫 그 자체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민청련의 정치적 위상을 키워줄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방치할 경우 전두환의 일본 방문을 비롯해 5공이 금기시해 왔던 광주 문제 등에 대한 정부비판 집회가 공인되는 셈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 결과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 집회 자체는 눈 감아 주되, 집행부를 소란죄나 거리질서 위반 등의 사소한 혐의로 경범죄를 적용해 유치장에 구류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따라 1984년 한 해 내내 집행부는 유치장을 들락거려야 했다. 8·15 행사 시기에만 김근태 의장 등 집행부와 회원 13명이 최장 15일에서 10일까지 구류처분을 받았다. 바야흐로 구류처분이라는 새로운 탄압 수단이 등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