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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시절, 상당히 긴 시간 나는 학교 폭력에 시달렸다.
유년 시절, 상당히 긴 시간 나는 학교 폭력에 시달렸다. ⓒ pixabay

유년 시절, 상당히 긴 시간 나는 학교 폭력에 시달렸다. 하지만 누군가 그 당시 나를 봤다면 아마 의아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을 때, 나는 '저 정도면 일부러 때리라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해자들이 웃으며 다가오면, 나는 진짜 친구처럼 보일 만큼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이유는 있었다. 가해자들이 나를 때릴 때, 괜한 저항으로 화를 돋우면 폭력이 더욱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은 만만한 화풀이 대상인 나를 찾게 됨을 의미했으므로, 나는 최대한 이들의 기분을 좋은 상태로 유지해야만 했다. 나에게 폭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탈학교' 뿐이었다. 그리고 어린 나에게 그것은 인생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살아남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런 설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나와 가해자의 관계를 단지 '친구'나 혹은 '짓궂은 장난을 치는 사이' 정도로 알았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피해자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사실은 내가 그들에게 주기적으로 맞고 있었다고 알리면 사람들은 대번에 내가 '학교 폭력 피해자'였음을 인지했다. 단지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가해가 발생하던 당시와 전후 정황 때문에 자신이 피해자임을 너무도 쉽게 의심받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성폭력 피해자들이다.

대화 나눴으니 '꽃뱀'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

가령 얼마 전 벌어진 '한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익히 알려져 있듯 피해자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신이 겪었던 일을 공론화하자 가해자 쪽도 맞대응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피해자와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가해자는 자신과 피해자가 이전부터 서로 호감을 보여 왔으며, 사건 당일도 술을 마시고 고백을 한 후에 모텔에서 정상적인 성관계를 맺은 것뿐이라고 주장했다(현재 해당 글은 삭제되어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다).

이에 꽤 많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이 피해자가 사실은 가해자를 무고하게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는 소위 '꽃뱀'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사건 직후에 피해자가 가해자와 메시지까지 주고받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주장했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나 증인이 잘 나타나지 않는 성폭력 범죄 특성상 증언의 신빙성이나 정황을 통해 사태의 전말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고 생각해도 '꽃뱀'을 언급하는 남성들의 반응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평소 친밀한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실제로 그런 사이였다고 해도 그것이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가해자의 말을 빌리자면 '정상적인 성관계'가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고 어떻게 모텔에 들어가게 되었나와 상관없이 성폭력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가해자 측이 공개한 메시지 내역은 이번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자료라는 것이다.

  5일 오전 서울 서초구 한샘 본사 주변이 적막한 모습이다.
5일 오전 서울 서초구 한샘 본사 주변이 적막한 모습이다. ⓒ 연합뉴스

성폭력 피해자에게 '정해진 역할'은 없다

또한 피해자가 사건 이후에 가해자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는 이제 막 입사한 신입 사원이었고 가해자는 그런 그녀를 교육한 선배 직원이자 이전에 벌어진 또 다른 성폭력(몰카) 사건의 경찰 조사를 도와주었던 조력인이었기도 했다. 피해자에게 그는 단순히 '나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건 이후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대하는 방식은 단순한 적개심이나 두려움을 보이는 수준을 넘어서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공동체 내 성폭력 사건에서 당혹감과 이후에 감내해야 할 풍파가 두려워 어쩔 수 없이 피해자가 가해자와 절연하지 못 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여기에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불평등한 권력 관계(신입사원과 직장상사)를 맺고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보자.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과는 달리 피해자는 단지 '피해자'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진공의 공간에 사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피해자의 반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구체적으로 개인이 점한 사회적 위치, 살아온 문화적 배경, 당시 처했던 상황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피해자가 일률적인 반응을 보이는 범죄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절도만 봐도 집요하게 가해자를 추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액땜했다 생각하고 그냥 포기하겠다는 사람도 존재한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 아무리 담담한 반응을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람이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폭력에 대해서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이 왜 이리도 강력할까.

 한국에서 여성은 독립적이고 복합적인 개인이기보단 집단적으로 성별화된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한국에서 여성은 독립적이고 복합적인 개인이기보단 집단적으로 성별화된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 pixabay

이번 사태가 보내는 '위험 신호'

어쩌면 그것은 지금껏 사회가 여성을 파악해온 방식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특히나 한국에서 여성은 독립적이고 복합적인 개인이기보단 집단적으로 성별화된 대상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여성을 향한 강한 혐오와 성 역할 부과가 대표적인 예다. 개인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서 쓰건 그것이 여성이라면 그녀는 '된장녀'가 된다. 적성에 맞건 맞지 않건 여성은 언젠가 아내나 혹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거의 모든 피해자가 여성인 성폭력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별에 따른 피해자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성폭력 사건을 겪은 피해자가 자신을 조력했던 직장 상사에게 피해를 입어서 저렇게 반응을 했구나'가 아니라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자'라면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다른 모든 관계가 그렇지만 특히 성적 관계의 경우, 상대방과 성실하게 소통하고 서로가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는지 파악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그 관계에서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성적인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성별이 아니라 그 너머의 개인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둘러싼 남성들의 반응을 보라. 여성이 친밀함을 표했기에, 같이 술을 마셨기에, 모텔에 함께 들어갔기에, 이후에 메시지를 주고받았기에 그녀가 성폭력 피해자일 리가 없다? 거꾸로 이는 많은 수의 남성들이 여성이 그러한 행동을 했을 때 이를 '성관계를 해도 괜찮다'는 신호로 파악하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다.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의 의미를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구체적 맥락이 아닌 상대방의 성별에 기반해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폭력을 저질러 놓고 그것이 폭력인지조차 인식을 못 할 수 있기 때문이다(가령 "'여성'이 모텔까지 갔으면 같이 자자는 거 아니냐"와 같은 생각). 그런 사람들이 무수히 돌아다니는 사회가 결코 안전한 공간일 리가 없다. 나는 한샘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큰 경고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샘#성폭력#여성혐오#페미니즘#고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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