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뇌물로 상납한 혐의를 받는 이병기 전 원장이 "대단히 송구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되레 '국정원을 흔들지 말라'며 검찰 수사에 반발한 남재준·이병호 전 원장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2014년 7월~2015년 2월까지 박근혜 정부의 두 번째 국정원장을 지낸 이 전 원장은 13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3부(부장검사 양석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다. 오전 9시 13분께 회색 승용차에서 내린 그는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포토라인에 섰다.
"아는 대로 소상히 밝히겠다"이 전 원장은 '특수활동비 상납 사실 인정하십니까'라는 취재진 질문에 "국정원 자금이 청와대에 지원된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실망과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안 그래도 위상이 추락해있는 우리 국정원 직원들에게도 이 문제로 여러 가지 부담을 준 것 같아 개인적으로 대단히 미안하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오늘은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나온 입장이기에 들어가서 있는 대로, 제가 아는 대로 소상하게 진술할 예정"이라며 "죄송하지만 여러분들 질문은 오늘 여기서 그만 받도록 하겠다"라고 말하고 청사 안으로 향했다. 취재진이 뒤쫓아가 "혐의를 인정하는 거로 받아들이면 되겠느냐"고 묻자 그는 옅게 웃으며 "나중에"라고만 답했다.
이 같은 태도는 박근혜 정부가 임명한 나머지 두 명의 국정원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난 8일 같은 혐의로 출석한 남재준 전 원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특수활동비를 왜 청와대에 상납했느냐'는 질문에는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했고, '대통령 지시가 있었느냐' 등 혐의를 구체적으로 물었을 때는 "국정원 직원들은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최고의 전사들"이라는 엉뚱한 답만 내놨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지난 10일 출석한 이병호 전 국정원장도 '딴소리'를 늘어놓는 건 마찬가지였다. 피의자 신분으로 포토라인에 선 그는 취재진이 질문도 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안보 정세가 나날이 위중해지고 있다"라며 "국정원 강화를 위해 국민적 성원이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만 남기고 포토라인을 떠났다. 혐의와 관련한 구체적 질문에는 어떤 답도 내놓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국정원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3개월 후인 2013년 5월부터 임기 전반에 걸쳐 최소 40억 원의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상납했다. 이렇게 넘어간 돈은 청와대 몫으로 편성된 특수활동비와 무관하게 비밀리에 보관되고, 집행됐다. 검찰은 은밀히 보관된 이 돈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날 이병기 전 원장이 출석하면서 검찰은 박근혜 정부 3대 국정원장을 모두 소환했다. 먼저 출석한 두 원장은 검찰조사에서 '청와대 지시로 특수활동비를 상납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병기 전 원장 조사를 마친 뒤 '특수활동비 수수자'인 박 전 대통령을 조사할 계획이다. 다만 시기와 방법은 아직 검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