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소심한 성격을 가진 나는 또래 남자아이들의 오락거리였다. 안경을 썼다고, 키가 작다고 따라다니며 놀림을 당하는 것. 머리를 짧게 잘랐으니 여자가 아니라며 남자화장실에 들어가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 신발을 가져가 공놀이하듯 서로에게 차대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하는 것.
이런 짓을 매일같이 당하면서도 무얼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얼굴을 붉히며 '하지 말라'고 조그맣게 말을 내뱉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건 별 효과가 없었다. 놀림감이 되는 게 지긋지긋해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이랬다.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네가 참아라.""그게 다~ 널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왜 나 보고 참으라고만 하고 걔네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난 아무 잘못 없는데? 남자애들이 다 그런 건 아닌데, 놀리지 않고 잘 대해주는 애들도 있는데? 나를 좋아한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는 게 맞지 않나?
질문들이 머리 속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지만 감히 말로 옮기진 않았다. '아직 내가 어리니까 모르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미래의 내가 이해할 수 있길 기대할 뿐이었다.
"이래서 여자는..." 매일 경험했던 여성혐오 아버지의 사업으로 이란에서 3년 반 남짓 살 때 정부가 새로운 발표를 냈다. 남자들이 흥분하여 여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자들이 공공장소에서 운동경기를 보는 것을 금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남자들이 위험한 건데 왜 여성들에게만 조심하라고 하는 거지?
공공장소에서 폭력을 저지르는 걸 법으로 금지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그럴 수도 있다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가지고 왜 여자들의 권리를 뺏는 거야?같은 농구 경기를 하더라도 남자들은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어도 되지만 여자들은 히잡에 엉덩이를 가리는 긴소매 웃옷과 긴바지를 입어야 하는 나라. 머리카락이 보인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경찰들에게 위협을 받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살던 내게 간간이 물음표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 의문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외국인이 몇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을 맞서는 건 버거워 보였다. 다른 이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살았기에 나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친언니, 아는 언니와 연휴로 한산한 거리를 돌아다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오는 노출증 변태를 만나고 그에게 집요히 쫒겨 다녔을 때도, 지인이 아무도 없는 육교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할 만큼의 의식은 있었으나, 그저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라고 치부할 수밖에. '앞으로 아빠랑 자주 다니고, 육교는 빨리 건너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오를 뿐이었다. 우리가 아니라 가해자들이 전적으로 잘못했다는 생각은, 부끄럽게도 그 당시 14살이었던 내겐 없었다.
학교 보건 수업 시간에 "섹스는 신이 내린 신성한 행위"라고 주장하며 성행위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던 남학생은 그 "신성한 행위"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여성들을 깎아내리기 바빴다. 미녀와 야수 실사 영화를 보고 엠마 왓슨에게 반했지만, 그녀가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쓰레기 취급했다.
자기가 하는 말이 성차별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닥치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후배이기에, 여성스러움(femininity)과 여성운동(feminism)의 차이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기에, 이런 분야에서 상식적인 언행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 무지함에 머리가 아프고 혈압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만행이 밝혀져 한국에서 시위가 한창일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래서 여자는…"나를 힐끔거리며 말하는 남학생의 웃음 섞인 말투를, 내가 폭발하길 기대하는 눈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히틀러와 스탈린과 광해군이 남자가 권력에 서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느냐'며, '한 사람의 악행으로 그 성별을 가진 다른 모든 사람을 깎아내릴 순 없다'고 쏘아붙이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다.
페미니스트는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질문한다 페미니스트라고 나 자신을 지칭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섭고 어려운 일이다. 누구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보건 시간에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대해서 배울 때였다. 토의 시간에 불쑥 누군가의 입에서 '페미니즘'이 거론됐는데 옆에 있던 여자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페미니즘, 뭐 성평등 같은 건 옳다고 생각하는데 페미니스트들 하는 짓 때문에 페미니스트는 아니야."예상치 못한 반응이기도 했고, 어디서부터 무엇을 지적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그저 멍하니 있었다. 그 애가 하는 말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의 권리와 성매매에 대해 에세이를 쓰고 발표하는 아이가, 페미니스트들이 부끄러워 성평등 운동에 동의표를 던지지 못 하겠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물론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옳다는 소린 아니다. 여성참정권을 위해 싸우던 서프러제트(Suffragette)들 중에는 방화범과 자살 시위자도 있었고, 그래서 군중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즉, 페미니즘이 항상 '올바르게' 실천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섣불리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실수하는 사람이 있고, 모순적인 사람이 있다.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가해자가 있고, 남성우월주의자 중에서도 피해자가 있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문제에만 관심을 보이고 노력을 쏟는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분명히 보이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면,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문제를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국제구호단체에 얼마나 많은 돈을 기부하던 개발도상국들의 현 체제, 나아가 전 세계 국가들의 상호관계가 향상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계속 영양실조와 설사와 말라리아로 죽어나갈 것이다. 김정은이 돌연사한다고 해서 통일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화석 연료의 사용을 멈춘다고 해서 지구온난화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명쾌하고 완벽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다급함에 사로잡혀 괜한 일에 꼬투리를 잡거나 아무 의미 없는 언행에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해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킨 적이 많다.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인생 좀 편하게 살라고, 무시하는 법도 배워보라고 충고한다.
잦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왜 항상 흐름을 거스르며 내 의견을 피력하는 지를 묻는다면, "공포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내가 성차별적인 발언을 들으면 그냥 넘기지 않는 덴 이유가 있다. 저 한 마디, 저 조롱을 무시하면, 문제적인 발언이 아무런 반박 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차츰 그런 사상이 나를 물들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몸부림친다.
앤서니 도어의 퓰리처 수상작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에서 가정부 마네크 부인은 독일군에 대항하려하고, 엔티엔씨는 이를 말리려 한다. 둘 사이엔 짧은 말다툼이 벌어진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지, 다른 의미는 없다'고 말하며 마네크 부인을 저지하려 하는 에티엔씨에게 부인은 이런 명언을 던진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은 협력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침묵은 곧 긍정이라는 옛말에서도 알 수 있듯, 무반응은 곧 무불만이고, 따라서 묵인이나 다름없게 된다. '당신이 하는 발언 또는 행동에 아무런 의견이 없으니, 계속해도 별 상관 없다'고 읽히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저항한다.
퉁명스레 던진 말에 상처받은 남자에게 "남자야, 여자야?"라고 묻는 여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지적한다. 여성만이 세심함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상에 반대한다. 키가 180cm인 여학생 앞에서 "여자 키가 180cm가 넘으면 그게 여자냐?"고 말하는 남학생에 맞선다. '여자의 신체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발언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도, 듣는 사람이 나 자신뿐일지라도, 해결책을 예상할 수조차 없더라도, 나는 항상 질문을 던질 것이다. 아무도 뺏어갈 수 없는 '생각할 권리'로 끊임없이 기존 체제의 문제점에 맞설 것이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현 세상에 수긍하며 내가 굽히고 살아간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의 내가 막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지금의 내가 아무 것도 못할지라도, 조금 더 많은 것을 경험한 미래의 나는 더 나은 대처법을 알 거라는 희망에 의지해갈 것이다. 나는 매일같이 나 자신을 향한, 동시에 세상을 향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것이 그 누구도 내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무기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창비·오마이뉴스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공모 기사입니다. (공모 관련 링크 : https://goo.gl/9xo4z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