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는 네팔이라는 나라를 몰랐어요. 세계지도를 펴고서 멧골이 무척 깊고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로만 여겼습니다. 바다란 없이 온통 땅으로 둘러싸였기에, 바다를 안 끼면 답답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어요. 높은 멧골로 둘러싸인 나라에서는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집에서 살려나 매우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어요. 그리고 네팔이란 나라에 '네팔말'이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지요.
"저 방글라데시 친구가 지어 준 이름 있는데, 아샤(Asha)라는 이름이에요." "아샤라는 이름은 네팔에도 있어요!" "그래요? 아샤는 '희망'이라는 뜻이랬어요." "네팔에서도 똑같은 뜻이에요. 희망!" 그렇게 내 이름은 다시 아샤가 되었다. 나랑 같이 네팔에 일하러 온 언니는 '마야(Maya)'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야는 사랑이라는 뜻이랬다. (23쪽)네팔이라는 나라에서 지내며, 또는 네팔을 숱하게 오가면서, 한국하고 네팔을 잇는 디딤돌이나 징검돌 구실을 한다는 서윤미 님이 쓴 <네팔은 여전히 아름답다>(스토리닷 펴냄)를 읽다가 첫머리에서 네팔말 두 가지를 듣습니다. 하나는 '아샤'요, 다른 하나는 '마야'입니다. 아샤는 네팔말로 꿈이라 하고, 마야는 네팔말로 사랑이라 한대요.
꿈하고 사랑. 꿈이랑 사랑. 두 낱말을 곱씹습니다. 한국에서는 '꿈'을 이름으로 삼는 분은 드물지만 '꿈이'처럼 뒷말을 붙여서 즐겁게 쓰곤 합니다. '사랑'은 이름으로 널리 써요. 뜻으로도 느낌으로도 결로도 '꿈·사랑'은 매우 고운 말이지 싶은데, 이는 네팔에서도 매한가지라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말이 다르고 땅이 달라도, 삶을 바라보는 마음은 서로 같구나 싶어요.
매일 1500여 명의 네팔인들이 이주 노동을 떠나며 매일 3명씩 죽어서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그날 공항에서 누군가 울고 있으면 공항에 죽은 이주 노동자의 관이 들어오는 날이라 했다. (32쪽)이 방은 아주머니 딸이 쓰던 방인데 딸은 지금 시집가고 없다고 했다. 내가 자기 딸과 꼭 닮아 딸 생각이 난다며 손에 유채꽃 기름을 들고 들어오신 것이었다. 걷느라 힘들었을 나를 생각하며 나의 종아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시더니 유채꽃 기름으로 내 종아리를 문질러 주셨다. (47쪽)
네팔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이 네팔에서 조용히 살림을 지으며 살기가 만만하지 않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로 떠나서 돈을 버는 젊은이가 많다고 해요. 어느 한쪽에서는 관광하러 가는 나라로 여기는 네팔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이주노동자가 빠져나가는 나라인 네팔이라지요.
날마다 천오백에 이르는 네팔사람이 돈을 벌려고 제 나라를 떠나는데, 이 가운데 날마다 셋은 주검으로 네팔에 돌아온다고 해요. 우리는 이 대목을 얼마나 알거나 느낄까요? 왜 네팔이라는 나라는 날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제 나라를 빠져나가야 할까요?
집에 텔레비전이나 손전화를 들여야 하기에 이주노동자가 되어야 할까요. 학교교육을 받으려면 돈이 드니 식구 가운데 누군가 이주노동자가 되어야 할까요. 현대 문명이 깃든 집을 새로 지어야 하니 이주노동자가 돈을 벌어다 주어야 할까요.
세계문화유산은 무너졌고 곳곳에 안전표지판이 즐비했다. 무너진 잔해 옆에서 사람들의 일상은 그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지 1년 반이 지난 2016년 여름, 자다가 갑자기 나는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네팔은 여전히 아름다운데'라며. 왜 내 입에서 자다 말고 그런 문장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뜨자마자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216쪽)<네팔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네팔은 예나 이제나 그대로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관광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요즈음이든, 관광이란 없던 지난날이든, 이주노동자가 되려고 네팔을 떠나는 사람이 많은 오늘날이든, 이주노동이란 없이 모두 고향마을에서 조용히 눈밭바라기를 하던 지난날이든, 네팔은 네팔답게 아름답다지요. 무시무시한 지진 탓에 네팔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이 무너지고 삶터가 쓰러진 이즈음에도 네팔은 한결같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면 네팔이라는 곳은 무엇이 아름다울까요? 네팔사람은 네팔에서 스스로 어떤 아름다움을 마주할 만하고, 네팔을 찾아나서는 이들은 어떤 아름다움을 만날 만할까요?
가만히 혼자 두 시간 동안 앉아 있으니 안개가 내려앉고 이동하면서 들리는 산과 산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의 안개소리가 들린다. 마을이 잘 내려다보이는 돌에 앉아 있으니 뒤로는 바람소리만, 앞으로는 마을의 소리가 들린다. (128쪽)대자연보다 경이로웠던 것은 결국 네팔인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나는 얼마나 내 손으로, 내 힘으로 할 줄 아는 게 있을까 하는 부끄러움이 들었다. (168쪽)예부터 이 땅은 고요한 아침나라 같은 이름을 얻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없이 해맑게 피어나는 하늘빛이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한자말로 금수강산이라고도 했어요. 비단에 그림무늬를 새기듯이 멧골이며 냇물이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있지요, 이 땅이 예부터 아름답고 고요하며 아침나라 같았다면 멧골이나 냇물만 이와 같다는 뜻은 아니라고 느껴요. 이 땅에서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는 사람들이 저마다 싱그럽고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느껴요.
아름다운 삶터를 아름답게 가꾸기에 아름답게 노래하고 일하고 살림하면서 아이를 낳아 돌봅니다. 눈부신 숲을 정갈하게 돌보기에 기쁘게 꿈꾸고 웃고 이야기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마을마다 두레나 품앗이를 이룹니다.
네팔이라는 나라를 놓고 예나 이제나 아름답다고 한다면, 빼어난 숲터만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이 숲터를 가꾸면서 삶을 짓는 네팔사람이 더없이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문화유산이라 하면 닳을까 손상될까 만지면 안 될 것 같고,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이미지가 강하다면 네팔에 와서는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숨쉬는 문화유산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10쪽)
네팔말로 꿈이랑 사랑을 뜻한다는 '아샤·마야'를 되새깁니다. 우리는 네팔에 가서 아샤나 마야 같은 고운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네팔사람은 한국에 와서 꿈이나 사랑 같은 고운 말을 들을 수 있어요.
아샤와 마야가 네팔을 곱게 가꾸고, 꿈하고 사랑이 한국을 곱게 돌봅니다. 사람한테 붙이는 이름으로도, 숲터나 마을이나 나라나 멧골에 붙이는 이름으로도, 아샤·마야하고 꿈·사랑은 즐거운 노래가 되리라 봅니다.
사람 사이에 숲이 있고, 숲 사이에 사람이 있어요. 사람 사이에 깊은 멧골하고 눈밭이 있으며, 깊은 멧골하고 눈밭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네팔도 한국도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터전이라는 이름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네팔은 여전히 아름답다>(서윤미 글·사진 / 스토리닷 / 2017.9.28.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