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넓은 들녘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입니다. 풍성하게 일렁이던 노란 들판은 이제 드문드문 빈 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린 모가 살랑이던 5월에 시작된 만남은 그 모가 자라고 풍성해지고 초록에서 황금색으로 변했다가 토실한 낟알이 되어 쌀로 변하는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저희들도 함께 변해왔습니다.
우리는 '정신질환자 직업 재활시설 강화 희망일터'(아래 '희망일터')에서 활동하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 파견지원사업의 파견예술인들입니다.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은 예술인의 사회적 가치 확장을 위해 예술인들이 기업/단체와 함께 다양한 예술직무영역을 개발하고 협업에 기반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업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선정된 예술인들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선정한 기업·단체에 가서 예술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기업, '희망일터'올해 4월, 전국 833명의 예술인들이 182곳의 기업/단체로 파견되었습니다. 이 많은 인원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기업에 파견될 수 있느냐? 매칭이라고 불리는 이 작업은 쉽지 않습니다. 1990년대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이었던 <사랑의 스튜디오>를 기억하는 분들은 '사랑의 작대기'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182곳의 기업/단체들이 책임 예술인(퍼실리테이터라고 부릅니다)들과 논의해서 자신들의 이슈와 욕구를 올리면 그것을 보고 예술인들이 1차 선택을 하는 겁니다. 2차로는 기업/단체가 자신들에게 지원한 예술인들의 면면을 보고 승낙 혹은 거절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업/단체의 승낙을 받은 예술인들이 다시 최종 승인을 함으로써 매칭이 완료됩니다. 이런 일을 세 번 반복해야 했습니다. <사랑의 스튜디오>가 그랬듯이 작대기가 몰리는 곳이 있고 단 한 개의 작대기를 받지 못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원한 희망일터는 단 한 개의 작대기도 받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희망일터는 정신질환자들의 직업 재활시설입니다. 희망일터에서 생활하는 당사자들 중에는 조현병 환자가 대부분입니다. 조현병은 10대 후반에서 20대의 나이에 시작하여 만성적 경과를 갖는 정신적으로 혼란된 상태를 유발하는 뇌 질환입니다. 이것은 비교적 흔한 병으로 백 명 중 한 명이 걸리는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이 걸릴 수 있으며 남녀 빈도는 비슷합니다.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뇌의 기질적 이상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12명의 정신질환자들이 생활하는 희망일터는 강화섬 쌀을 도정하는 정미소입니다. 희망일터의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일터가 좀 더 산뜻하고 좀 더 안락한, 그리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회색의 벽들이 세련된 색의 옷을 입기를 바랬고 따뜻한 느낌의 그림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를 바랬습니다. 또 피곤할 때 누워 쉴 수 있는 휴게실과 푹신한 소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도 있었습니다.
박정호 희망일터 사무국장은 "이제 막 문을 연 이곳이 지역의 명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만남의 광장'을 통해서는 단 한 명의 예술인도 유치하지 못했습니다. 예술인들이 지원을 하지 않으면 그해의 해당 기업·단체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결국, 음악을 하는 황도연 퍼실리테이터가 작년에 함께 했던 예술인들을 설득해서 불러 모으고 3차에 걸친 매칭작업을 통해 어렵게 4명의 예술인들이 모였습니다. 1명의 배우와 3명의 다큐멘터리감독.
희망일터가 간절히 원했던 미술 장르의 예술인은 단 한 명도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첫 모임이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밥을 짓지는 못하지만 삶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건넬 수가 있습니다. 따뜻한 그림과 푹신한 소파로 신체적인 안락함은 지금 즉시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음악과 놀이와 공기로 또 다른 의미의 편안함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정신장애인, 예술인들과 함께 즉흥연기 무대에 오르다앞으로 여덟 번에 걸쳐 차차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궁금하실까 봐 몇 가지 힌트만 드립니다. 5개월에 걸친 긴 여정의 끝은 희망일터의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즉흥연기 무대에 서는 것입니다. 정신장애인도, 즉흥연기도, 그리고 파견예술인이라는 이름도 모두 다 생소하지요? 여덟 번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동안 그 생소함이 정다움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강화 희망일터에서의 5개월 동안 우리들도 변했으니까요. 그 변화와 희망일터의 이야기들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이번 주 토요일 8시, 한국즉흥극장에서 그 첫 무대가 펼쳐집니다. 그 시작을 함께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