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은 부분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대단했다. 작은 권력이라도 잡으면 그것 이상으로 행세해서 잡음을 일으켰다. 꼴사나워 못 봐 줄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작가 윤흥길은 '완장'이라는 소설로 이를 조소(嘲笑)했겠는가.
정치에서의 이것은 분명 권위주의 정권의 잔재이다. 군사 문화의 여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군인은 계급으로 서열화 되어 있고 서열이 올라갈수록 권위를 더 갖게 된다. 최정점 군인 출신 대통령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무소불위(無所不爲)!
이럴 때, 대통령은 일반 국민과 별종의 사람이었고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위치했다. 일제 강점기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할 적 일왕(日王)을 현인신(現人神)이라 했다. 유신독재가 더 길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2002년 예상한 것과는 달리 노무현이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사회운동을 함께 한 동지들의 신년하례식이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있었다. 그 이듬해 1월 초순이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노무현도 참석한다고 했다. 그가 달리 보이는 건 당연한 이치.
식장에 도착하기 전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권위의식을 싫어하는 노무현이지만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니만큼 전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와 축하 악수나 나눌 수 있을까. 그런데 무척 자유로웠다. 수행원들이 따르긴 했지만 그는 대부분의 참석자들과 인사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솔직히 그때 처음 '우리' 대통령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이런 데 있다. 지난 11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포항 지진 피해 현장을 방문했다. 색다른 사진 한 장이 마음을 동(動)하게 했다.
대통령, 행자부장관, 도지사 등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피해와 복구 상황을 듣고 있었다. 예전이면 당치도 않을 모습이다. 전 정권만 해도 이런 장면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용보다 형식을 더 중요시하지 않았는가. 세월호 현장을 한 번 떠올려 보라.
권위는 자기가 창출하는 게 아니다. 진정한 권위는 남이 만들어 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 지역을 되돌아보게 된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마련되어야 하는 단체장과 기관장 그리고 선출직 공무원들의 자리, '나'는 시민들과 가진 힘의 정도가 다르다, 이런 표식인가.
시민들 속에 쪼그리고 앉아 브리핑 듣는 대통령을 보면서 내려놓는 권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모든 행사에서 다 그럴 순 없겠다. 그러나 많은 행사에서 이건 가능할 것 같다. 시민 속에 어울려 있다가 눈에 띄는 대로 소개 받고 인사하는 분위기.
앞으로의 지도자는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권위를 내려놓고 시민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사람이 지도자로 선택받기 쉽다. 독일의 수리 경제학자 비트포겔은 동양인은 절대자를 필요로 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건 푸른 눈의 산물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나를 대신해서 정치를 해 달라 대의제도를 일컫는다. 이때 나를 대신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을 뜻한다. 나와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내 친구와 같은 사람, 그런 관계 속의 권위를 생각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역신문 <김천일보>에 '정치인과 권위의식'이란 이름으로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