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열두 척이 안 됩니다." 지난 8월 28일 '현재의 통상교섭본부의 인력과 자원으로 한미FTA 개정 협상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겠느냐'는 국민의당 손금주 의원 질문에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아래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같이 답했다.
4개월이 지났다. '12척에 불과하다'던 통상교섭본부의 인력과 조직은 충원되었을까?
아니다. 산업부는 지난 27일 손금주 의원에게 제출한 서면답변에서
"현재 한미FTA 관련 대응을 위한 조직 신설을 관계부처와 협의 중이며, 향후 직제 개정 이후 관계부처 파견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답변했다.
4개월 넘도록 '12척에 불과'한 통상교섭본부미국 정부가 한미 FTA 개정을 공식요구한 것은 지난 7월 12일이다.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산업부에 한미FTA 공동위원회 개최를 제안하는 외교서한을 보내
"미국의 수출을 위한 한국 시장 접근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다루기 위한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이후 8월 22일 서울에서 제1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 회의, 10월 4일 미국 워싱턴에서 제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가 진행됐다. 한미간 협상이 2차례나 진행되었음에도 통상교섭본부의 인원이 충원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단초는 <경향신문> 김지환 기자의 11월 24일자 기사에서 볼 수 있다.
"다음달로 예정된 한중FTA 2단계 협상 범위를 둘러싸고 청와대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사진) 간 온도 차가 감지된다. (중략) 청와대,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김 본부장은 한·중 FTA 2단계 협상에서 상품 분야까지 다루려는 계획으로 알려졌다. 김 본부장이 최근 청와대에 통상교섭본부 인력을 3배 늘려달라고 요구한 것도 이 구상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한미FTA 개정협상에 나설 인력 보충을 서두르는 대신, 한중 FTA 2차 협상의 범위를 상품 분야로까지 넓힌다는 계획 하에 통상교섭본부는 대규모 인력증원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행정안전부의 정원 증원 협의가 늦어졌다는 것이다.
사안의 긴급성을 따지지 않은 '뒤죽박죽 행정'이다. 이미 본격화된 한미FTA 개정협상이 성공할 수 있을지 불안한 첫 번째 이유다.
미국이 제기한 50개 이상의 '상세목록', 감추기에만 급급한 통상교섭본부더 큰 불안은 통상교섭본부의 변함 없는 밀행주의에 있다. 미국의 통상전문지 'Inside US Trade'는 지난 22일 "한국 정부, 미국이 한미FTA 요구를 명확히 할 것을 기다려(South Korea waits on U.S. to clarify KORUS demands)"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 의하면, 미국은 한미FTA 1차 공동위원회에서
"농업 분야 관세 인하를 포함한 50가지 이상의 '상세한 목록'을 제시했다"고 적고 있다.(During the first special session of KORUS' joint committee, the U.S. presented what one source called a "laundry list" of more than 50 demands including a request that Korea drop all remaining agriculture tariffs.)
하지만 그간 우리 정부는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세부 이슈가 무엇인지 국회와 국민에게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1차 회의 이후인 8월 23일 '미국이 제기한 세부 이슈가 무엇이냐?'는 손금주 의원의 질의에 대해 "무역 적자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 한국이 아이디어 좀 내 줬으면 좋겠다 이 수준이었습니다"라면서 감추기에만 급급했다.
뿐만 아니다. 산업부는 3개월 뒤인 지난 11월 28일 "한미 FTA 1차 공동위에서 미국이 제시한 50개 이상의 '상세목록'의 세부내용"을 제출하라는 박주선 국회 부의장의 자료요구에 대한 답변에서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논의가 진행중인 바, 현 시점에서 언급하기 어려움을 양해해 주시기 바람"이라면서 밀행주의 행태를 지속했다.
이같은 통상교섭본부의 자료제출 거부는 불법이다. 통상조약법 제5조 제1항에 의하면, "정부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및 통상 관련 특별위원회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진행 중인 통상협상 또는 서명이 완료된 통상조약에 관한 사항을 보고하거나 서류를 제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후를 가리지 못하는 통상교섭본부에게 현행법률 따위는 무시되고 만다.
조직 확충도, 국민적 동의 확보도 모두 낙제점이다. 다가오는 한미FTA 개정협상에서 어떻게 국익을 확보할 수 있을까?
'12척의 배'를 믿지 말고, 5200만 국민을 믿어야다시 김현종 본부장이다. 김 본부장은 지난해 2월 더불어민주당 입당 기자회견에서 한국경제가 위기에 처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 깊은 곳으로부터 단호한 음성이 들렸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다'는 소리였다"이순신 장군의 말을 인용하면서,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판단 하에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현종 본부장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대한민국에는 300명의 국회의원과 100만 명이 넘는 공무원과 5200만 명의 국민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헌법은 결코 단 1명의 통상관료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기도록 예정하고 있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하는 외교를 하겠다면서 '국민외교센터'를 신설하겠다고 한 것 역시 이 때문이다.
김현종 본부장은 정치인이 아닌 행정공무원이다. 이제 '12척의 소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시작은 통상교섭본부 조직 충원이다. 작년 8월 산업부 답변에 의하면, 2013년 3월 통상기능의 산업통상자원부 이관 이후 외교부에서 산업부로 전입한 77명의 통상인력 중 26명(33.8%)이 다시 외교부로 복귀하거나 타 부처로 전출됐다. 한미FTA 협상 과정의 경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속히 당시 협상을 담당했던 통상인력을 보강해야 한다.
또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하는 '국민과 함께 하는 외교'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제시한 '50개 이상의 세부과제 목록'을 즉각 국회와 국민, 관련 업계에 공개해야 한다. 국민과 국회의 도움 없이 '12척'의 소신을 가진 통상관료 한 사람이 초강대국 미국의 '미치광이 전략'을 이겨낼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일(1일) 개최되는 한미FTA 개정협상 관련 2차 공청회가 김현종 개인의 소신을 버리고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시작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국회 FTA연구모임 대표'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