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부모님에 대한 걱정이 유독 컸던 해였다. 설을 앞둔 며칠 전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엄마가 한 번 더, 아버지가 두 번이나 입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엄마의 첫 입원은 걱정이 컸다. 자식 모두 모여 대책회의까지 할 정도였다. 눈에 보이는 어떤 증상 때문에가 아니라 노환으로, 그래서 뚜렷한 치료방법이 없는 증상으로 입원한 것이라 매일, 시시각각 불안하고 두려웠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만일의 경우'를 늘 생각하게 됐다. 나이가 많은 부모님을 둔 자식들 대부분이 그렇듯 부모님께 별다른 일이 없어도 그리 오래지 않아 감당해야 할 언젠가의 이별을 생각하고 스스로 먹먹해지곤 한다.
한밤중 울리는 전화를 받기까지 그 짧은 순간에 불안해지곤 한다. 아버지가 70대 중반을 넘기던 무렵부터이니 대략 10년이 좀 넘었다. 이런 와중이라 엄마의 입원 이후 계속된 부모님의 입원은 더욱 두렵게 와 닿곤 했다.
언제든 노인 그리고 노인 문제, 즉, 노후에 관심 가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연로한 부모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신의 노후에 대해 생각하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 40대 중반을 넘기던 몇 년 전부터 관련 기사나 책이 보이면 찾아 읽곤 한다. 애써 찾아 읽을 때도 있다.
가장 인상 깊게 남고 있는 책은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 간다>(관련기사:
http://omn.kr/b9th )이다. 소설가 이상운씨가,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 돌연 아프기 시작, 돌아가시기까지 3년 몇 개월 동안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담담한 필체로 쓴 글들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죽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풍조를 이야기하고 있어서 '죽음'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한 책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의 사랑 그 마지막은 내가 죽은 후 내 자식들이 내가 남긴 것들을 정리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최대한 덜어주는 것, 그러자면 평소 정리해 가며 살아야 하고 최소한만 가지려 애써야 한다는 것. 만일의 경우 인공호흡기 같은 생명 연장 장치를 원하지 않음을 미리 밝혀놓음으로써 쓸데없는 감정소모나 경제적 부담을 남기지 않는 것. 화장해 자연에 돌리느냐 납골하느냐? 같은 문제로 고민하지 않게 하는 것, 적든 크든 부모가 남긴 돈 때문에 서로에게 손가락질하고 싸우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와 같은 생각들을, 내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정리하게 했다. 아울러 '평균 수명 그 절반을 훌쩍 넘긴 지금부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 책이 되었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들녘)도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 간다>처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언젠가는 보내드려야 할 부모님, 어떻게 보내드리는 것이 최선일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읽었다. 이에 이미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 간다>를 통해 생각, 지향하며 살고 있는 것들을 되새김하듯 읽은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몇 년 동안 중환자실 근무를 해오고 있는 현직 의사(호흡기내과)다. '같은 일을 8년이나 하다 보니 반복되는 일상에 매너리즘을 느끼게 되고, 환자 저마다 우주에 하나 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의학이라는 안경을 끼고 보니 진단명으로 분류되고 마는 것에 아쉬움 같은 것들을 느끼게' 됐단다. 이에 '몇 년 전부터 환자들과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글로 적게 됐는데, 그로 훨씬 많은 것들을 느끼고 얻게' 되었단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다수의 사람들이 질병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삶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현대인에게 질병은 삶의 일부가 되었다. '삶'은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없는 만큼 이제는 illness(주: 어떤 질환에 대한 환자와 가족의 감정적 반응과 심리 상태 등)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더욱더 필요한 시기다.
환자와 가족의 '감정'에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들의 감정을 살피는 일은 '나'의 삶을 거울에 비춰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거울에 몸 전체를 비추려면 한 발짝 뒤로 크게 물러서야 하는 것처럼, '병원에서의 삶'은 거울을 딱 그 정도 거리에 두고 서 있는 것과 같다. 나의 삶 전체를 지그시 바라보는 일. 어쩌면 환자들과 함께했던 날들의 기록이 도리어 우리의 삶을 조망해 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누구나 머잖은 미래에 맞닥뜨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과 함께 늙어가는 유한한 존재니까.' - 들어가는 말에서.
책에는 '호흡기내과의가 만난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숨소리'란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자신이 만난 유형이 전혀 다른 여러 사람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 공공연히 터부시되고 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해 볼 수 있게 한다.
아울러 죽음을 앞둔 누군가를 위해 보호자나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스스로 묻게 한다. 이야기 틈틈 병원 치료 관련 우리의 실태나, 언제든 환자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우리가 알면 도움될 병원 치료 관련 알 것 등을 들려주기도 한다.
'지난 97년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은 의료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뇌를 다쳐 응급 수술을 받은 환자를 부인의 요구로 '가망 없는 퇴원' 조치를 취했던 의사가 살인죄로 기소되었고 징역형을 받은 사건이다. 보라매병원 사건 이전에는 살 가망이 없는 환자에 대해 가족과 의료진이 합의하는 경우 '가망 없는 퇴원' 조치를 함으로써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도 인턴 때 집에서 임종을 맞길 원하는 가족들을 위해 환자를 집까지 이송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사건 뒤 모든 게 사라졌다. 의사들은 자칫 의사면허증을 내놔야 할 수도 있는 모험을 결코 하지 않았고-할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살인방조범이 될 수도 있는 일을 누가 하겠는가- 모든 환자를 임종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치료했다.연간 수십만 명의 환자들이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받다가 병원에서 사망했고, 그것은 환자 가족들의 정신적, 경제적 고통으로 이어졌다. 한 번의 판결이 가져온 결과가 의료 전반에 몰고 온 변화는 이렇게나 쓰리고 아팠다. 아픈 것은 의사도 마찬가지다. 나의 치료가 상대방에게 불필요하고,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중하는 일이 될 때 너무도 괴롭고 불편하다. -189~190p.책을 읽다가 우리도 존엄사가 시행된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본 기억이 있어서 찾아보니 '최근 한 달 새 존엄사로 삶을 마감한 사람이 7명. 우리나라도 내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다(2017. 11월 28)'는 뉴스가 보인다. 참고로 존엄사는 의식이 있는 상태의 환자 스스로 죽음과 관련 치료를 선택하는 것으로 약물 등으로 죽음을 돕는 안락사와 전혀 다르다.
40대 중반을 넘기며 부모님과 영영 이별하는 친구들이 늘고 있다. 죽음에 대해 터부시 강한 우리 사회이기도 하고,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지난 몇 년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 간다>를 권했더니 일부는 적극 공감하고 일부는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부정적인 그들에게 "왜?" 반문하면 죽음이 두렵다는 것. 공연히 우울해진다는 것, 기분 나빠진다는 것, 그래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으랴. 책에서 읽은 어떤 아들이 떠오른다. 3년 전에 이미 뇌졸중으로 쓰러져 침상에서만 살아오다 응급실로 실려 와 이제는 죽음 밖에 선택할 수 없는 91세 어머니를 보내지 못하는 이였다. 생명연장 처치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뭣보다 자신이 어머니를 보낼 마음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애초의 약속과 달리 생명연장 장치를 선택한 어느 안타까운 아들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풍조와 개인화, 전문가들에게 전적으로 위임된 임종과 장례문화 등으로 현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회피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지금이야말로 잠시 멈춰 서서 서로의 존재를 감싸 안아야 하는 순간"이라고. 적어도 이 책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를 읽는 사람들은 책 속 그 아들과 같은 어리석음이나 안타까움은 자초하지 않으리라.
덧붙이는 글 |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이낙원) | 들녘 | 2017-11-13 ㅣ정가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