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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비례해 현명함이 저절로 생긴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늘 갈등하고 잘못하고 후회하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오늘 실수하고 내일은 그만큼 지혜가 쌓이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좌충우돌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배고파, 오늘 저녁 뭐야?"
"김치찌개야."
"고기 많이 넣었어?"
"응, 두 근 넣었어. 김치보다 고기가 더 많아."
"오… 맛있겠다."

짭조름한 저녁을 먹고 나면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찾고 또 서너 시간 지나면 야식을 먹는, 배고프면 화가 나는 남자. 키 183cm, 몸무게 90kg. 내 아들이다.

집에서 얼큰 새콤한 김치찌개를 먹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른다. 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넣으면 김치찌개에서 감자탕 맛이 난다. 사실은 고기찌개라고 부르는 게 더 맞다. 김치는 거들 뿐. 하지만 고기가 부족할 때 아들의 얼굴에 감도는 허탈함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느니 감자탕 맛 김치찌개를 끓이는 게 낫다.

남편과 나는 주로 채식을 한다. 건강을 위한 건 아니고 생활비를 뛰어넘는 식비(고기) 때문이다. 내가 아들과 다니면서 21년간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아이고 엄마는 안 먹고 아들만 먹이는 갑다"이다. 나는 아들이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다행히 키가 커서 비만처럼 보이진 않는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들 친구 두 명이 와있다. 반갑게 맞아준다. 끼리끼리 논다고 이 친구들은 키 185cm에 몸무게는 100kg에 가깝다. 밤에 골목길에서 마주쳤다면 도망가고 싶게 만드는 덩치들.

환한 미소를 보여준 뒤 주방으로 가보니 싱크대에 곰솥과 그릇들이 담가져 있다. '사람 셋이 라면을 먹는데 도대체 몇 개를 먹기에 곰솥이 필요할까' 생각하며 설거지를 한 후 예쁜 바구니에 귤을 담아 아이들에게 준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뭔가 어색하다. 몇 걸음 떼다 돌아보니 북극곰 세 마리가 간장 종지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그림이다. 아차! 나는 귤이든 상자를 통째로 건넨다. 아이들은 이제야 잇몸 만개 미소를 보여준다. 미소 천사들.

 지난해 이들 셋이 각자 번 돈을 모아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만석인 비행기에 아이들은 나란히 앉았단다. 이후에 닥칠 재앙은 생각지도 못한 채.
지난해 이들 셋이 각자 번 돈을 모아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만석인 비행기에 아이들은 나란히 앉았단다. 이후에 닥칠 재앙은 생각지도 못한 채. ⓒ the polar bear programme

지난해 이들 셋이 각자 번 돈을 모아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만석인 비행기에 아이들은 나란히 앉았단다. 이후에 닥칠 재앙은 생각지도 못한 채. 셋이 나란히 앉으니 입추의 여지가 없더란다.

꽉 끼어 앉아서 오순도순 담소를 나누던 중 식사가 나왔다. 식판을 앞에 놓고 셋이 동시에 팔을 움직여 밥을 먹을 수 없었던 북극곰들은 밥때마다 한 명씩 서 있었단다. 남들 밥 먹을 때 혼자 중간에 서서 어색함을 견뎌야 하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스토리에 울었다.

북극곰1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공장에 취직했다. 총 직원이 3명인 이곳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는다. 역시 '재벌 2세(본인 주장)'답게 오너드라이버다. 연식을 알 수 없는 경차를 타고 다니는데, 셋이 그 차에 타면 마치 튜닝한 스포츠카 같다. 차체가 바닥에 깔린다. 몸무게가 적폐다. 구김살 없는 얼굴이 이 아이의 매력이다.

북극곰2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했다. 주유소, 편의점, 피시방을 돌아 지금은 휴대폰 대리점에서 일한다. 나는 그가 오늘 휴대폰을 몇 대 팔았는지, 팀장한테 어떤 구박의 말을 들었는지, 또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도 안다. 그리고 곧 있음 실적 부진으로 퇴출위기에 있다는 것도. 농담인 듯 우스갯소리를 섞어서 하는 말이지만 말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인다.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는 아이가 부당한 일을 당할까 봐 귀를 쫑긋하고 듣다가 내가 더 흥분할 때도 있다.

아픈 아들의 도전을 응원하는 이유

북극곰3인 내 아들은 삼수생이다. 올해도 눈이 내리던 그 날 시험을 봤다. 아들이 수능을 치르던 날, 나는 밤새 깨어있었다. 뒤척이다 잠들었을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니 울컥한다. 내색은 서로 하지 않았지만 사실 아이도 나도 힘들었다.

아들은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앓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다. 그동안 건강하던 아이였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랐다. 스트레스와 유전적인 소인이 원인이라는데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친정엄마가 그 병을 심하게 앓았기 때문에 내가 그 체질을 아이에게 물려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삼수를 하는 동안 입시 스트레스 때문인지 약을 먹어도 쉽게 낫지 않았다. 주 증상은 숨만 쉬어도 몰려오는 엄청난 피로감이다. 이 상태로는 수능준비 자체가 불가능하단 걸 안다.

아들은 대학으로, 일터로 자신들의 자리를 잡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돌아갈 자리가 없는 자신이 초조했을 것이다. 아무런 소속감이 없을 때 느끼는 소외감에 아이는 몸부림쳤을 텐데. 그래서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을 물리치고 삼수생이란 울타리에 들어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픈 몸에 육체노동은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아이가 그저 무엇을 하던 등을 두드려 주리라 마음먹었다. 아이가 물에 흠뻑 젖은 솜처럼 축 처진 몸을 일으키려 애를 쓸 때 나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밀어준다. 가만히 있어도 칼로리가 소모돼 눈만 뜨면 배가 고파지는 아들을 위해 하루에 밥을 다섯 번 차릴 때도 있다.

과다한 약물복용으로 갑상선 기능이 한때 저하돼 몸무게가 10kg 이상 늘었다. 검사상의 수치는 나아진다는데 아들의 몸은 훨씬 더 망가져 보였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아들의 얼굴에 스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놓칠 리 없는 나는, 그래서 가슴이 내려앉는다.

아들의 이런 상황을 애 아빠도 물론 잘 안다. 하지만 아들에게 기대가 컸던 만큼 아빠는 미련이 남는다. '조금만 더 기운을 내서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남아, 늦게까지 자고 있는 아들을 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남편의 마음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남편보다 아픈 아들이 더 신경이 쓰이는 나는 그럴 때마다 남편을 흘겨보며 말한다.

"좋은 대학을 가고 못 가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같이 사는 이 순간이 백배 더 중요해. 그냥 지지해주고 기다려줘.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욕심을 버려야 모두가 행복해져."

물론 나도 아들 성적이 좋았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있다. 하지만 '기대+실망=화'라는 연산이 가족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안다. 기대란 탈을 쓴 욕심의 종말은 서로를 향한 증오임을….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포항지진으로 2018 대학수학능력평가가 일주일 연기된 지난 11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포항지진으로 2018 대학수학능력평가가 일주일 연기된 지난 11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수능 날, 아이가 시험을 치렀던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벌써 어두컴컴해지고 한꺼번에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나는 멀리서도 '나의 북극곰'을 단번에 찾아낸다. 나를 발견한 아들의 첫마디는 주옥같다.

"엄마, 고기 먹으러 가자. 아, 그리고 도시락 너무 맛있었어요. 감사해요."
"시험 전에는 체력보강 해야 한다고 고기 먹고, 시험 끝나면 끝났다고 고기 먹고, 고기가 뭘 그렇게 너한테 잘못했냐?"

나의 말에 아들은 헤헤거린다.

저녁을 먹고 나니 북극곰들이 기다리고 있다.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자기네 직장에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시끌벅적 난리다. 인생의 쓴맛을 보여주겠단다. 네 주제에 무슨 대학이냐고 말하는 아이들이 오히려 정겨워서 웃었다. 젊은 수컷들의 우정 어린 말들. 나를 뒤로한 채 사라지는 아들이, 또 이런 날 아들이 외롭지 않게 기다려준 북극곰들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아들#수능#북극곰#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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