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엔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걸리는 것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면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지인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 저지르고 나서 후회되지 않는 두 가지가 여행과 목욕이야."그 말을 함께 들었던 이들이 다 고개 끄덕이며 공감했지만, 살다 보니 여행은 목욕만큼 저지르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정말 미리 계획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떠날 기회가 왔고 그야말로 와락 저지르게 됐다. 비행기를 예약하고 열흘 만에 진짜 비행기 안에 앉아 있었다. 목적지는 프랑스 파리.
11월도 끝자락에 접어든 파리는 분위기 있는 버버리 코트를 차려 입고 멀리 사라지는 신사의 뒷모습처럼, 늦가을의 멋진 뒷자락을 보이고 있었다. 거리 곳곳은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무리지어 바람에 쓸려다니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특히 세느강 주변은 '정답고 쓸쓸한 낙엽 밟는 소리'가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걸어서 개선문을 가고, 에펠탑을 가고, 목적지가 없어도 무작정 파리 도심을 걸어다녔다. 걷다 보면 어디선가 빵 굽는 구수한 냄새가 코끝으로 다가와 걸음을 붙잡았다. 치열한 삶의 현장을 벗어난 덕분인지 빵 굽는 냄새와 마른 낙엽 향기로 가득한 늦가을의 파리는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뮤지엄 패스를 준비한 덕분에 파리 시내의 모든 박물관은 표를 사는 수고를 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세계 3대 박물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는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를 다녀온 많은 사람들의 얘기와는 달리 박물관 안은 전혀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다. 깃발을 든 단체 관광객들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덕분이었다. 한국인 한 팀, 중국인 두 팀 정도를 만났을 뿐 단체 관광객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덕분에 어딜 가든 사람에 치이지 않고 맘껏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인기 있는 전시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모나리자는 12호 크기의 작은 작품이라 관광객들이 몰리는 성수기 때 가면 먼 발치에서, 미술책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작은 그림을 보고 올 수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코앞까지 다가가 감상하는 행운을 누렸다.
모나리자는 '리자 마담'이라는 뜻,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콘다의 부인이라는 모나리자의 미소는 직접 보니 더 신비로웠다. <모나리자>는 20대 후반의 나이로 추정이 된다고 하는데, 20대 후반에 어쩌면 저렇게 우아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
파리는 도시 전체가 그대로 미술관이고 박물관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나와 우리나라 수목원에나 있을 법한 큰 나무들이 늘어선 튈르리 공원을 따라 10여 분을 걸어가면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고, 미술관 옆 세느강을 건너가면 오르세 미술관이 있다. 뮤지엄 패스를 미리 준비하면 파리 시내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어디든 들어갈 수가 있다.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1900년 파리가 세계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지었던 기차역인데 미술관으로 개조를 했다고 한다. 오르세 미술관의 외경을 보면 처음부터 기차역을 이렇게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설계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다.
르누아르와 고흐, 밀레, 모네 등이 그린 미술책에서 보던 명화들을 직접 보고 느끼는 감동은 대단했다. 수백 년이 지난 그림들이 마치 어제 그린 듯 생생한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림 못지 않게 부러운 장면 중의 하나는 박물관 곳곳에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와서 미술수업을 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평생 한 번 볼까말까 한 그림들을 일상에서 이렇게 접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프랑스가 패션과 디자인의 강국이 될 수 있는 배경이 바로 이런 문화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물어 보니 일년 중 파리가 가장 한가할 때가 11월이라고 했다. 여름휴가와 추석 황금 연휴를 거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파리를 다녀가고, 다시 12월 방학과 연말 여행을 준비하면서 관광객들이 잠시 쉬는 시기가 바로 11월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파리를 가장 여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11월에서 12월초가 제일 좋은 시기라고 했다.
파리 지하철은 오래돼 낡고 지저분한 단점은 있지만 파리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어 자유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파리에 도착해 지하철 정액권 '나비고'를 준비하면 매번 표를 끊는 수고를 하지 않고 파리 명소 어디든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향한 곳은 몽마르뜨, 해발 130여미터 정도의 나즈막한 언덕인 몽마르뜨는 이 곳을 거쳐 간 수많은 예술가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언덕이 됐다.
파리가 발전을 거듭해 가던 19세기, 가난한 예술가들은 파리 도심에 방 한 칸 얻을 돈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파리와 가까우면서도 방 값이 싼 곳을 찾던 이들이 모여든 곳이 파리의 북쪽 끝 몽마르뜨,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몽마르뜨의 낭만적인 풍광도 예술가들을 끌어들이기에 더없는 조건이었다. 어느새 몽마르뜨는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가난한 예술가들의 천국이 됐다.
반고흐가 동생 테오와 함께 몽마르뜨에 거주하며 그림을 그렸고, 르누아르와 모딜리아니, 모네도 이 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청년 피카소는 공장을 개조한 공동작업장 세탁선에 들어와 가난한 화가들과 모여 살며 그림을 그렸다. '아비뇽의 아가씨'도 이 곳에서 탄생했다.
화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음악가들도 몽마르뜨를 거쳐 갔다. '민첩한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선술집 '라팽아질'에서는 에디트 피아프가 노래를 했다. '빠담 빠담 빠담'을 애절하게 노래하는 에디트 피아프를 보기 위해 이브 몽땅을 비롯한 많은 남성들이 이 술집을 찾았고,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에릭사티'라는 음악가의 이름은 몽마르뜨에서 처음 들었지만 그의 생애와 음악이 가슴 깊이 파고 들었다. 지금은 '짐노페디'라는 곡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 작곡가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아카데미즘 음악에 반감을 느끼고 대중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거실의 탁자나 소파같이 생활에 도움을 주는 편안한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가구음악'이라고 불리었다.
자신의 곡에 '오만하지 않게', '달걀처럼', '수줍고 차갑게' 연주하라는 독특한 지시를 넣어 연주자들을 당황시켰다는 작곡가, 그가 작곡한 '벡사시옹'의 악보는 단 3줄에 불과한데 '840번을 연주하세요'라는 단서가 붙어 있어 전곡을 연주하려면 1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이 음악은 그가 죽은 뒤 24년이 지나 존케이지에 의해 비로소 연주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고 불리운 작곡가, 에릭사티는 몽마르뜨의 선술집 '라팽아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생을 연명했다고 한다.
몽마르뜨에 모여 살던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멀리 내려다 보이는 파리 도심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아득하게 느껴졌을까? 그러나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고 했던가? 몽마르뜨 언덕에서 가난했지만 뜨겁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젊은 예술가들, 삶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감당했던 그들은 지금은 세계사에 왕관처럼 화려한 그들의 이름을 남겼다.
세계사에 큰 획을 남긴 그들도 한때는 물감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으며, 사랑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고, 세상의 인정과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무시 당했으며, 선술집에서 연주를 하며 생을 연명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사실이, 먼 나라에서 찾아온 여행객에게 공감과 위안을 불러일으킨다.
'그래, 삶이 그저 쉽고,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사람이 어딨겠어?' 인생의 가장 큰 무기는 어쩌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견디는 것인지도 모른다. 130미터의 낮은 언덕 몽마르뜨는 그런 내세울 것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품어 안은 자궁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몽마르뜨에서 루브르까지, 예술가들의 삶을 따라 파리를 걷다 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만만치 않았을 인생에 한 번 맞짱 떠볼 배짱과 용기가 생겨난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에 화려하게 자리한 세계적인 화가들의 진짜 인생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파리를 여행할 때 몽마르뜨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들의 꿈과 열정이 건네는 위로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