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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억지 주장을 홍보하는 전시관을 만들기로 했다는 보도가 지난 11월 27일 나왔다. 해당 전시관엔 독도 영유권 주장에 활용해온 고문서와 고지도를 전시하고, 무료 입장으로 운영될 것이라 알려져 국내외 많은 이들의 공분과 우려를 자아내게 했다.

또한 유네스코는 메이지 산업시설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일본에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의 정서를 반영해 제국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함께 알리도록 하라'는 권고를 내렸지만 일본은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일본이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전후 연합국의 일본 처리 방식에서 기인하는 면이 크다는 게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연합국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철저히 단죄하지 않고 쉽게 면죄부를 줬고, 일본은 손쉽게 전쟁 책임에서 벗어났다.

현재 일본은 과거의 범죄를 망각하고 점점 우경화되고 있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일본의 현재 상황이 1930년대와 비슷하다고 우려를 표한다. 일본은 전쟁 후 만들어진 '평화헌법'을 개정해 군대를 갖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바뀌려 하고 있다.

일왕의 반전 연설 그리고 맥아더의 편지

 맥아더와 히로히토가 처음 만난 1945년 9월 27일 촬영됐다. 오늘날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남았다.
맥아더와 히로히토가 처음 만난 1945년 9월 27일 촬영됐다. 오늘날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남았다. ⓒ US Army photograph

1945년 8월 15일로 돌아가 보자. 이날 일본인들은 일왕의 대국민 라디오 방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일본인들은 일왕의 육성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오에 있을 연설을 기다리며 일본인들은 모두 비장한 결의에 젖어 '명예 자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6일 전에 있었던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패전을 인정하게 됐고, 이제 남은 일은 일왕 이하 1억 인이 수치를 당하지 않고 당당히 목숨을 끊는 일뿐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라디오 연설에서 일왕은 "최후의 1인까지 항전하자"라는 말 대신 "칼을 내려놓으라"고 촉구했다. 이것은 일본뿐 아니라 조선과 중국, 연합국까지도 놀라게 한 반전이었다고 한다. 뒤이어 나온 일본 열도의 반응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축제가 벌어진 것처럼 들뜨고 행복해했다고 한다.

천황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라는 광기 앞에서 집단 죽음으로 내몰렸던 쇼와 시대의 일본인들에게 '이제부터 죽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더구나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다고 하니 축제일이 도래한 것처럼 반가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본인들이 정복자인 미군에게 바랐던 것은 첫째도 둘째도 오직 '천황제의 존속'이었다.

​같은 해 8월 30일, 일본에 도착한 맥아더는 이러한 일본인의 국민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일본에 군정을 실시하고 더글라스 맥아더를 사령관에 임명해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일왕을 정점으로 일사분란하게 조직되고 위계화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특징을 잘 알았고, 일본 내에서의 일왕의 권위와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일왕을 전범재판 법정에 세우는 것보다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것이 미군의 점령정책에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가 1946년 1월 아이젠하워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편지엔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맥아더는 "천황이 과거 10년간 일본 정부의 결정에 크게 관여한 증거는 없다. 만약 천황제를 파괴하면 일본도 붕괴할 것이다. 일본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진다면 100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라고 썼다.

'자유의 몸'이었던 A급 전범들

결국 히로히토 일왕은 전범으로 기소되지도, 처벌받지도 않게 됐다.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은 물론, 일본 내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천황의 기소를 주장했지만 맥아더가 적극적으로 비호하면서 일왕은 처벌받지 않았다. 맥아더는 미국의 수뇌부와 전범재판에 참여한 연합국을 상대로 "일본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끈질기게 회유하고 설득했다. 전후 국제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고, 극동전범재판의 판사도 미국에게 임명권이 있었다.

일왕의 불기소 방침이 공식화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의 전쟁 범죄를 입증하는 문서들이 소각돼 도쿄 하늘의 회색 연기로 영원히 사라졌다. 막상 시작된 극동군사재판(일명 도쿄 재판)엔 겨우 28명만이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15년 전쟁(1931년 만주사변~패전에 이르는 일본의 침략전쟁 기간)'의 실질적인 입안자이자 실행자들로서 내각, 군부의 핵심 지도자들이었다.

같은 시기 침략전쟁에 동원된 수많은 일본인과 한국인, 대만인이 아시아 각지에서 열린 연합군 BC급 전범재판정에서 유∙무기형 및 사형을 언도받았다. 수많은 평범한 일본인들이 백인 제국주의에 맞서는 유일한 아시아의 방파제가 되라는 군부의 선전에 속아 전쟁에 나갔다. 한국인, 대만인들도 강제로 전쟁에 동원됐다. 이들은 일본의 패전으로 조국이 독립됐고, 이제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기다린 것은 귀향이 아니라 전원 억류 후 전범 색출 작업, 재판과 처벌이었다.

아시아 각국의 BC급 전범재판에서 148명의 한국인이 전쟁범죄인으로 처벌받았다. 대만인은 173명, 일본인은 8379명이었다. 특히 한국인 중 23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됐다. ​"일본인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의 명령"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전쟁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던 힘없는 식민지 청년들이었다. 일본의 주장대로 한국인이 일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에 불과했다면 어째서 도구에게 처벌을 내릴까. 또 명령자인 일왕은 왜 처벌받지 않을까. 그것이 BC급 전범재판의 모순이자 폭력이었다.

다카하시 데츠야 도쿄대 교수는 <한국인과 일본 전범재판>에서 "서구 여러 나라와 일본이 행한 식민 지배의 폭력이 다시 한번 '사법 폭력'으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A급 전범을 재판했던 극동군사재판에선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1946년 5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약 30개월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진 전범은 불과 7명이었다. 나머지 피고인들은 한 달 후인 12월 전원 석방됐다.

한국인과 일본인 BC급 전범들이 아시아 각국의 수용소에서 도쿄의 스가모 교도소로 이송돼 복역 중일 때에도 이들 A급 전범들은 자유의 몸이었고, 1000명에 육박하는 내각과 군부의 지도자, 전쟁 중 일본군에 협력했던 민간인(전범기업 재벌)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맥아더는 어떻게 '푸른 눈의 천황'이 됐나

 토미 리 존스가 맥아더로 분한 2012년 영화 <맥아더 : 일본 침몰에 관한 불편한 해석> 중 한 장면.
토미 리 존스가 맥아더로 분한 2012년 영화 <맥아더 : 일본 침몰에 관한 불편한 해석> 중 한 장면. ⓒ 유나이티드 퍼폼즈 스튜디오

맥아더가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일본인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적극적으로 히로히토를 보호했고, 그로부터 전범의 이미지를 벗겨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 '푸른 눈의 천황'으로 불리며 일왕보다 더 인기 있는 외국인 섭정이 됐다. 일본에서의 성공적(으로 보이는) 점령정책을 바탕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까지 출마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멋지고 극적으로 포장하는 것을 좋아했고 대중적 인기를 즐겼다.

아시아 각지에서 벌어진 B, C급 전범재판에 관한 한, 그의 관심은 필리핀에서 자신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겼던 야마시타 도모유키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야마시타가 군인으로서 명예롭게 죽고 싶다며 총살형을 주장했으나 맥아더는 그를 교수형에 처해버렸다.

일본의 침략으로 크나큰 고통을 겪은 아시아인의 희생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맥아더 가문은 필리핀에서 2대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과 이권을 행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필리핀 총독이었고, 그 자신도 식민지 필리핀의 통치자로서, 백인 제국주의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연합국이 일본을 단죄했다면... 지금과 같은 역사왜곡이 있었을까

같은 시기 유럽에서 나치가 전쟁 범죄와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엄하게 추궁당하고 있는 동안 일본은 쉽게 용서받고 면죄부를 받았다. 일제로부터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당한 아시아인의 손으로 직접 일본을 철저히 단죄하지 못하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드넓은 식민지를 경영했던 연합국들이 일본을 단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히로히토가 2차 대전에 관여한 정황은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만주사변 지지, 하와이 진주만 기습 재가, 중일전쟁 화학무기 사용 재가 등 그의 전쟁 범죄 중 극히 일부분만 밝혀졌다. 전쟁에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과 평범한 시민에서 전범으로 전락했던 무수히 많은 이들의 억울함을 뒤로 하고 히로히토는 62년간 재위했고 1989년 1월, 88세로 사망했다. 그의 재위 기간 중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불과 7년 만에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고 전쟁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오늘날 일본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싸워봤다" "우리는 어쨌든 전쟁에서 한 번 밖에 지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 덕분에 근대화가 됐다"라고 큰소리를 친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일본을 제대로 단죄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이 자력으로 독립했더라도 이렇듯 큰 소리를 칠 수 있을까.

지난 10월 22일 치러진 제48대 일본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연립여당이 압승을 거뒀다. 전체 465석 가운데 2/3 이상인 310석을 차지해 세 번째 집권에 성공했고 '평화헌법' 개정안 발의에 필요한 의석수도 확보했다. 장기 집권과 평균 50%를 넘는 높은 지지율에 힘입어 헌법 9조 개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천황을 국가통수권자로 하는 일본의 재무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이 군대를 가지는 것을 허용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중국을 견제하고 북한의 핵 도발에 대응해야 하는 미·일의 공통된 이해가 공고해질수록 양국의 밀월도 깊어진다. 양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일본이 지난 세기에 태평양에서 중국, 동남아에 이르는 드넓은 곳에서 2000만 명 이상의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잔인한 식민 통치를 했던 나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일본은 점진적으로 재무장 해왔다"

한국과 일본의 보수 우파는 끊임없이 과거에 발목을 잡히지 말고 발전적인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친다. 대다수 일본인에겐 피해자 의식이 크고 가해자라는 인식이 희박하다. 하지만 일본의 적극적인 과거 청산 노력이 없다면 양국간에 우호적인 미래는 담보될 수 없다. 일본의 집단 자위권과 재무장 시도로 동북아의 평화가 위협받는다면 과거처럼 일본이 대충 용서받고 잘못이 망각되는 역사가 다시 반복되긴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양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현대 세계에서 역사도, 책임도 떠맡지 않았다. 중국은 일본에게 아시아에서 일본의 책임을 다하라고 강제하고 있다. 일본이 선택과 결정을 연기해온 유예기간은 이제 만료됐다.

패전 당시, 나는 10살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나는 항상 군사력 거부가 기본인 평화헌법과 반핵 3원칙(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만들지도 사용하지도 않는다)이 전후 일본의 근본적인 이상들을 잘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그런데, 사실 일본은 점진적으로 재무장을 해왔다. 일본인들은 전쟁과 원폭 투하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죽은 자들이 평화의 이상을 존중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 <르 몽드> 2011년 3월 17일자 인터뷰 '희생자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중에서 인용·편집

* 참고 문헌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패배를 껴안고-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민음사, 2009
앤드루 고든 지음, 김우영 옮김, <현대 일본사>, 이산, 2005
우쓰미 아이코, 이호경 옮김,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동아시아, 2007



#연합국#일본#맥아더#전범#천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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