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땅을 파고 묻으려고 했대요. 한겨울이라 꽁꽁 언 땅을 파고 엄마를 묻으려고 하는데, 찢어진 입술 사이로 거품이 흘러 내리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산 채로 땅에 묻힐 뻔한 여인은, 자신을 묻으려고 했던 가족들의 손에 의해 서둘러 병원으로 옮겨져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1937년 7월, 중국 본토를 침략한 일본군은 12월 13일 당시 수도인 난징으로 입성하여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과 포로들을 대량학살하기 시작한다. 당시 임신 6개월에 열아홉살 새신부였던 리슈잉(2004년 작고)은 특히 여성들만 노리는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지만 결국 붙잡히고 만다. 이대로 강간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마음 먹은 그는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목숨은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정신이 드니 병원의 침대였는데 그의 앞에는 칼을 찬 일본군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정신이 번쩍 들어 일본군의 칼을 빼어 들고 저항했지만, 이내 나타난 2명의 병사들에게 온 몸이 칼에 찔려 다시 정신을 잃고 만다. 일본군은 임신중인 그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탯속에 아이가 있는 복부에도 칼을 휘둘러 아이는 사산하고 엄마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지난 10일 일본 나고야시 여성회관 '이블 나고야'에서 난징대학살 80년을 맞아 '난징대학살 나고야 증언∙강연 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서는 잔인한 일본군의 만행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난 고 리슈잉 할머니의 둘째딸 루링씨가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만행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리슈잉할머니는 생전에 나고야에서 증언 집회를 가진 적도 있다고 한다. 루링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중국과 일본이 평화롭고 사이좋게 지내길 원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해 분노했고 물질적 배상 이전에 최소한 진심어린 사죄라도 해주기를 바랬다고 강조했다.
현장 담은 필름의 존재 알고도 역사 부정하는 일본 정부
이날 집회에서는 루링씨의 증언에 앞서 1991년 일본의 MBS방송이 미국 엘에이에서 발견한, 1937년 당시 난징에 있었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찍은 학살현장을 소개하는 영상을 상영했다. 이 필름에는 당시 일본군이 난징의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그 시신을 유기하는 등의 잔혹한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학살 현장을 촬영한 선교사들은 삼엄한 일본군의 감시를 뚫고 난징을 빠져나와 상하이의 국제예배당에서 처음으로 난징학살의 영상을 상영했다고 한다.
선교사 중 한 명인 피치 목사는 전쟁이 끝난 뒤 미국으로 이 필름을 가져와 학살을 증언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밝혀진 외교문서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정부가 이 필름의 상영이 반일정서를 부추기고 있음에 우려를 표하고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이것은 지금도 난징대학살을 부정하고 있는 일본 정부가 아주 오래 전부터 학살의 진실을 담은 필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일본정부는 지금까지도 '학살'을 부정하고 있다.
'20만'과 '0', 역사인식의 차
난징과 자매결연 도시인 나고야에서는 난징대학살의 역사를 기억하고 일본이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NO MORE 난징'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지난 1997년부터 매년 12월 난징대학살 증언 집회를 열어오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 2012년 나고야의 가와무라 시장이 나고야를 방문한 난징시 공산당위원회 방문단에게 "서로간에 전투가 벌어진 건 유감스럽지만, 이른바 난징사건은 없지 않았나?"라고 발언이 문제가 되어 난징시와의 교류가 끊어졌다.
이날 마지막 순서로 '난징대학살사건에 대한 심판'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난징의과대학 사회학부 몽궈샨 교수는 "난징대학살은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이미 인정된 내용이고, 일본은 이 재판의 결과를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전후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몽궈샨 교수는 "침략을 주도한 일본이 책임을 지고 반성해야 하며, 더 이상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1945년 이후 중국과 일본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따라서 앞으로도 이러한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나간 역사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정직하게 마주할 것을 주문했다.
'도쿄재판'에서 받아들여진 난징대학살의 희생자 수는 20만명이다. 그런데 일본은 지금도 민간인의 피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20만 대 0'. 이 엄청난 숫자의 차이가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침략전쟁의 역사가 아직도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증거가 없고 증인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데도 훤히 드러난 사실을 버젓이 부인하면서 꿈꾸는 그들의 '미래'는 과연 무엇일까? 연일 북한의 군사적 위협만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자신들에게도 이웃에게도 평화와 번영이 보장된 '미래'는 없다.
리슈잉 할머니가 삶의 마지막까지 그토록 원했던 한마디,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할머니는 떠나고 그 딸이 똑같은 말을 부르짖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 사회는 언제쯤 이들의 한맺힌 목소리에 진지하게 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