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시간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유학시절부터였던 것 같다. 그 시간은 족히 한 세대(30년) 이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기억이란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 당시, 셰익스피어에 매료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영국에 왔고, 당연히 세계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느끼고 싶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그의 고향 '스트랫 퍼드 어픈 에이븐'에 도착했다.
어깨에는 배낭이 들려져있었고, 가방 안에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Hamlet)이 들어 있었다. 햄릿과 함께 걸었다. 그의 고향 이곳저곳을... 한참 그렇게 그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기념품 가게에 발을 멈췄다. 가게 안에 있는 숱한 유혹의 물건들, 이것저것을 탐닉했다. 탐닉 끝에 눈이 자연스레 이끌려간 것은 바로 키홀더(Key Holder)였다. 무수한 모양의 키홀더들이 마음을 자극했다. 마음을 다스리며 세심하게 고른 키홀더 하나를 사서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
그때부터였다. 가는 나라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키홀더를 샀다. 그렇게 작은 소장품으로 내게로 온 키홀더가 지금은 함지박으로 하나다. 쇼파 옆 굳게 한 자리를 키홀더 함지박이 자리하고 있다. 무려 지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나라를 문학답사 명목으로 다녔다. 그때마다 '나를 데려가 달라'며 손짓하는 키홀더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내게로 와서 함지박에 옮겨 놓인 소장품, 키홀더는 모두 각각의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 모두다 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서...
오늘 물끄러미 함지박의 키홀더들을 쳐다보았다. 쳐다보다가 함지박 아래 놓여 있는 수많은 키홀더 중에서 하나를 조심스레 꺼냈다. 한 이삼 년은 족히 더 되었을 것이다. 그해 겨울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를 다시 읽고 있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고 무엇보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을 이렇게 잘 표현한 책은 없었기에 21세기 자본주의 관점에서도 세기적 상황을 비교하며 늘 다루었던 책이다.
그 순간이었다. 분노의 포도를 읽다가 갑자기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다시 한 번,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고 생각했다. 짐을 꾸리고 떠나자는 말에 남편은 말없이 동의했다. 며칠 뒤 우리는 시카고행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렇게 존 스타인벡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은 시카고에서 시작했다. 미서부를 관통하는 대륙횡단도로, 66번국도, The Mother Road를 따라가는 여정은 분노의 포도를 재음미하는 시간 속으로의 여정이었다. 여정 내내 '분노의 포도'로 인해 순간순간 먹먹함이 가슴을 메었다. 시린 가슴으로 그랜드캐년을 지나고 마지막 귀착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로스앤젤레스의 마지막 날 밤 산책길에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기리며 키홀더 하나를 샀다. 다양한 모양의 키홀더 중에서 유난히 심플함이 마음을 뺐었다. 깔끔함 자체가 좋아 그냥 손이 갔다. 키홀더 비닐봉지에는 3달러 99센트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열쇠를 끼는 동그란 고리 부분에 바코드가 나보란 듯이 선명했다.
키홀더의 바탕 전체는 흰색이다. 전체바탕에 검은 글씨로 CALIFORNIA 주표시가 바탕에 3분의 1을 차지한다. 바로 아래 굵은 검은 한 줄이 바탕전체를 두 영역으로 구분한다. 아래 영역에 US가 쓰여 있고 바로 아래 고딕체로 그 유명한 66 숫자가 쓰여 있다. 너무 강건하게...
모두 여행을 한다. 여행하며 적어도 여행지에 대한 기념으로 누구나 크건 작건 기념품을 사곤 한다. 그간 내가 사 모은 작으나 그곳을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소장품은 키홀더이다. 키홀더들은 보면 새삼 이 작은 기념품 키홀더에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추억이 존재하는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 숙연해진다.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