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민주주의: 시위와 조롱의 힘>(산지니 펴냄>을 통해 만난 사진 한 장이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 아마도 좀 바쁘게 살거나,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 같다. 여하간 맛있게 먹는 것으로 보인다.
평범한 시민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은 사실은 특별한 목적의 사진이다. 남자가 읽고 있는 책은 <1984>(조지 오웰), 사회 비판 소설이지만 때로 정치적·사회적 예언서로도 종종 해석되곤 하는 그 작품이다. 많고 많은 책 중 하필 이 책인 이유는, 남자가 샌드위치를 먹는 것으로, 그리고 책을 읽는 것으로 시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시민들은 '행복해지라'는 명령을 받았다. 충분히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태도 교정'이라는 명목 하에 군부로 끌려갔다. 다섯 사람 이상이 모이는 것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태국 사람들은 시위가 아니라 단지 각종 활동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금지령을 우회하였다. 저항의 한 형태는 샌드위치 먹기였는데, 이는 군사정권에 조심스럽지만 눈에 잘 띄게 '아니요'라고 거부하는 시위였다. 이는 '민주주의 도시락'으로 불렸다. 군부는 이런 불온한 점심식사를 한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샌드위치 먹기와 함께 책읽기도 또 다른 위험한 활동이 되었다. 공적 장소에서 드러내놓고 책을 읽는 학구적인 사람들은 체포되었는데, 군부가 명확히 태국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조지 오웰의 <1984> 같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었다."(40쪽)
또 다른 사진 한 장. 사진 속 육상 선수는 호주의 캐시 프리먼(아래 프리먼)이다. 그녀는 21세이던 1994년에 캐나다에서 열린 영연방 경기대회에 호주 대표로 출전, 400m 육상경기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딴다. 이것으로 일약 호주의 영웅이 된다.
그런데 프리먼은 우승하는 순간 그 누구도 섣불리 예측할 수 없었던 행동으로 호주인들은 물론 관중들을 놀라게 한다. 호주 토착민 깃발을 호주 국기와 함께 들고 트랙을 돈 것. 바로 이 사진이다.
경기 규칙에 어긋난 행동인 동시에 호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동이었다. 호주 팀 감독은 "며칠 뒤에 있을 200m 경기에서는 만약 우승해도 절대 그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는다. 하지만 프리먼은 다시 같은 행동을 하고 만다.
"이것은 내 경기다. 그러니 누구도 내가 토착민이라는 것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표현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62쪽)그리고 오히려 이처럼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는 그 무엇, 그에 대한 완강하며 확고한 뜻을 그런 식으로 전달한 것이다. 프리먼의 행동은 사실은 저항이자 시위였다.
캐시 프리먼은 왜? 그와 같은 행동을 했을까? 경우에 따라 우승이 취소될 수도 있는,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인데 말이다. 이해하려면 호주의 역사를 간략하게라도 알아야 한다.
유럽인들이 신대륙 탐험이란 미명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토착민)들을 쫒아내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처럼 호주도 유럽인들의 식민지화에 이은 집단 이주로 시작되었다. 대대적인 유럽인들의 이주 후 영국인들의 호주 토착민 탄압은 더욱 심했다고 한다.
호주 토착민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그런데 호주 정부는 토착민들의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수용소에서 자라게 하거나, 백인 가정으로 입양해 키우게 하는 정책을 편다. 토착민들을 백인사회로 흡수시키려는 교화정책의 일환이었으나 토착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절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1800년대 말부터 1970년까지 정책은 계속됐고, 이로 대부분의 토착민 아이들은 신체적·정신적 학대와 강제노역으로 인한 고통 속에 자랐다고 한다. 이들을 호주의 '도둑맞은 세대' 또는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른다.
프리먼도 희생자 중 한사람이었다. 그녀를 포함한 수백만의 호주 토착민들이 비인간적인 차별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양부모인 백인 부모의 권유로 육상을 시작한 그녀는 열 살 때 달리기 경주에서 우승한다. 하지만 메달을 받지 못한다. 프리먼이 받아야 할 메달이 백인 소녀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 부당한 처사는 그녀가 토착민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리먼의 저항은 당시 호주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6년 뒤에 열린 시드니 올림픽(2000년)에서 프리먼이 같은 행동을 해도 더 이상 6년 전과 같은 혼란이나 충격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행동 덕분에 호주인들이 자신들 역시 가해자이지만 부정하고 외면했던 호주 토착민들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하간 프리먼의 토착민들의 인권을 위한 강경한 저항은 호주인들의 공감을 얻는다. 그리하여 결국 시드니 올림픽 8년 뒤인 2008년, 호주 총리는 프리먼의 요구를 수용한다. 동시에 호주 토착민들에게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는 <거리 민주주의: 시위와 조롱의 힘>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샌드위치 먹기와 책읽기 시위와 캐시 프리먼의 우승, 이 두 장의 사진처럼 특별한 사연의 사진과 그리 길지 않은 글로 만나는 세계의 시위 현장, 그 이야기다.
저자는 인권운동가이자 다큐 작가로 오랫동안 세계 곳곳의 분쟁과 인권침해, 억압으로 인한 시위와 저항 현장들을 취재해 온 스티브 크로셔. 책 속 강렬하고 메시지 강한 사진들은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로 이 책은 그동안의 인권활동과 현장 취재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책은 세계 전역에서 일어난 50여 시위 현장들을 79장의 사진과, 3쪽 정도의 그리 길지 않은 글로 그들은 왜 시위를 해야만 했으며, 그들의 시위로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을 들려줌으로써 인권과 평화, 바림직한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책의 특징이라면 '시위와 조롱의 힘'이란 부제처럼 '저쪽은(권력 등) 물 대포나 체포, 감금, 고문, 그릇된 사고 등으로 우리를(민중, 여성, 반정부적인 예술 등) 유린하거나 탄압하지만, 우리는 폭력이 아닌 지극히 평화적인 방법(침묵, 책읽기, 빈 의자 놓기 등) 또는 조롱으로 맞선' 현장들만을 다뤘다는 것이다.
"뉴스로 나오기도 하지만,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시위들을 다 알기는 쉽지 않잖아. 책 보니까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는 시위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아. 그런데 사실 뉴스에 나와도 보는 것만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고, 뉴스가 전하는 대로만 잘못 알기도 하고 그러잖아. 작년 우리의 촛불시위처럼 해결해야만 할 문제와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시위를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왜 그래야 했는지 당사자인 우리만큼 알기 쉽지 않잖아. 반대로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해하기 쉽게 설명 참 잘해놨네. 덕분에 여러 나라 역사도 많이 알게 됐어. 기발한 시위 아이디어들이 재미있기도 하고…. 이처럼 시위만을 통해 어떤 나라에 대해 아는 것. 좋은 것 같아. 저자가 다시 이런 책을 쓴다면 작년에 우리가 모여 박근혜 탄핵을 외쳤던 우리의 촛불집회도 반드시 싣겠지?"(고향 친구)책을 읽다가 지난해 겨울 함께 촛불을 들었던, 누구나 어디에서든 촛불을 들었겠지만 그날 같은 현장에서 촛불을 함께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날 이후 보다 더 살갑게 느껴지는 고향친구들과 나누고 싶어졌다. 그중 두 친구에게 선물했더니 한 친구가 이처럼 소감을 말한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3월 10일까지, 123일에 걸쳐 매주 토요일마다 열렸던 20여 차례의 촛불집회. 시위 기간 중 단 한 번의 폭력사건도 신고 되지 않아 세계를 더욱 놀라게 했던 우리의 촛불현장. 그 필요성과, 변화의 힘에 공감한 사람들이라면, 단 한번이라도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공감이 훨씬 클 책이다.
덧붙이는 글 | <거리 민주주의>(스티브 크로셔 글과 사진) | 문혜림 (옮긴이) | 산지니 | 2017-07-28 | 정가 1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