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017년 한해도 끝자락에 와 닿았습니다. 광화문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은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까지 이뤄냈습니다. 주변에서는 많은 것이 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또한 많습니다. 사 측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들, 열심히 살지만 이달의 생계를 고민하는 자영업자들, 몸은 바쁘고 마음은 힘들지만 설 자리를 잃어가는 워킹맘 등 여전히 팍팍한 어제를, 고달픈 오늘을, 벅찬 내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1년, 안녕하셨습니까?" - 기자 말
세 개의 굴뚝에서 흰 연기가 올라온다. 나머지 한 개의 굴뚝에선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곳에 두 명의 사람이 있다. 홍기탁, 박준호. 충남 아산에 있는 파인텍의 노동자들이다.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 생활이 19일로 38일째다. 유독 추웠던 이번 주, 그들은 굴뚝 위에 비닐 천막을 치고 몸에 핫팩을 붙인 채 침낭에 들어가 추위를 견뎠다. 지난 12~13일 서울 최저기온이 영하 12도였다. 굴뚝 위로는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 체감온도는 훨씬 더 낮다.
땅에서 올려보낸 물은 죄다 얼어버린다. 보온병이 아니면 물을 먹지도 못한다. 당연히 씻는 것도 잘 엄두가 안 난다. 동상에 안 걸리기 위한 발 마사지와 운동은 필수다. 하늘 생활은 춥고 지독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땅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올라갔다"
15일 오전에 찾아간 굴뚝 아래엔 천막이 하나 세워져 있다. 안에는 방금 두 노동자가 먹을 밥을 올려보낸 금속노조 파인텍지회장 차광호씨가 앉아있다. 그는 '굴뚝 농성' 선배다. 2014년 6월부터 408일 동안 굴뚝 위에서 살다가 내려왔다.
차씨를 비롯한 파인텍 노동자들의 삶은 투쟁의 역사다. 2006년까지 한국합섬에서 일하던 그들은 공장 중단과 파산 등을 거치면서도 5년 동안 빈 공장을 지켰다. 2011년 4월부터 스타플렉스가 한국합섬을 인수해 '스타케미칼'로 이름을 바꾸고 공장을 재가동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년 7개월 만에 스타케미칼은 '시장의 공급 과잉으로 인한 적자'를 이유를 들며 폐업 후 청산 절차를 밟았다.
168명의 노동자 중 139명이 권고사직을 요구받았고, 29명이 해고당했다. 차씨는 스타케미칼이 노동자를 버리고 '먹튀'했다고 주장한다.
"공시지가 870억 원에 달하는 공장을 스타플렉스의 김세권 사장이 399억 원에 인수했어요. 1년 7개월만 공장을 돌리고 스타플렉스는 설비와 공장부지를 더 비싼 값에 팔아넘겼죠."차광호씨는 스타케미칼의 노동자 해고에 맞서 2014년 6월부터 408일 동안 굴뚝 농성을 하며 복직을 이끌어냈다. '3승계'(고용·노조·단협)를 보장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청산 절차를 밟고 있는 스타케미칼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 대신 해고자 11명은 모회사인 스타플렉스가 만든 새 회사인 충남 아산 소재 파인텍으로 복직해 2016년 1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제작하는 스타케미칼과 다르게, 파인텍은 천막 등에 쓰이는 방수 원단을 만든다. 일의 종류도 달랐지만, 더 큰 문제는 단체협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8차례 교섭을 했지만 사 측은 단체협약에 노동조합 활동과 상여금·수당 등의 내용이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 사실상 노조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복직자들은 2016년 10월 파업을 선언했다.
1년 동안 11명 중 6명이 떠나갔다. 5명만 남았다. 사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차광호씨 대신 전 파인텍지회장 홍기탁씨와 사무장 박준호씨가 굴뚝으로 올라갔다. 목동 CBS 건물 15층에 있는 스타플렉스 영업부에서 가장 가까운 굴뚝이다. 땅에서는 자본에 맞설 힘이 없던 이들은 결국 두 번이나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이번에는 역할이 뒤바뀌었다. 2014년 하늘에 올랐던 차광호씨가 두 사람의 하늘바라지를 맡았다. 누구보다도 굴뚝 농성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그는 왜 다시 동료들을 굴뚝으로 보내야 했을까?
"저희들이 밑에서 1년 넘게 노동3권에 있는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다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이 자신들에게 손해가 가는 게 없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이렇게도 안 되고 저렇게도 안 되고 할 수가 없어서 올라간 겁니다. 저도 올라가 봐서 알지만, 진짜 반대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노동자로 살아가려면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렇다고 우리 5명이 다른 데 가서 취직이 되느냐? (파업으로 인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을텐데...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까요? 그런 상황이면 기자님은 어떻게 하셨을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라도 해서 우리 삶을 해서 바꿔보자 하는 거예요."그들의 세 가지 요구사항
이날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 치유 공간 '와락'의 조합원들이 굴뚝 밑 천막에 도착했다. 2014년 12월부터 89일 동안 굴뚝 농성을 했던 쌍용차지부 사무국장 김정욱씨도 함께였다. 홍기탁·박준호씨는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김정욱씨는 "나도 한겨울에 올라갔는데 추위가 정말 만만치 않다. 귀 부분에 동상이 걸렸다. 버티는 방법밖에 없다. 오랜 기간 길거리에서 농성을 하면 몸이 단련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정신 건강이다. 사람이 사람하고 어울려 살아야 우울해지지 않는데 고립되면 정신적으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땅에서는 우리의 요구가 전부 공권력과 자본에 의해 막히다 보니, '고공농성'이라는 극한의 상태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단식하는 것도 관심을 안 가져주고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응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이런 투쟁해 본 당사자로서는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만난 후에, 하늘에 있는 사람들과 전화통화를 했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경찰에 의해 막혀있다.
홍기탁씨는 "바람 때문에 더 춥고 굴뚝이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핫팩을 붙이고 있고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운동과 마사지도 병행하고 있다"면서 건강은 괜찮다고 전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자본에게 맞설 힘을 갖기 위한 민주노조와 민주노조를 지탱할 단체협약이 필요했기에 굴뚝에 올라왔다고 역설했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아요. 기본 노동조건, 노동조합 활동, 복지, 임금 등을 회사에게 요구하기 위해서 만드는 게 노동조합이잖아요. 노조가 없으면 자본가들과 싸울 수 없는 무기가 없어요. 노조가 없으면 최저임금에 아무 혜택도 못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어요. 민주노조의 활동이 보장돼야 합니다."이어서 연결이 된 박준호씨는 낮 기온이 영상권으로 진입한 이 날 오후에야 오랜만에 머리를 감을 수 있다고 밝혔다. 주위에서 굴뚝 올라가는 것을 막았냐고 묻자 웃으며 "말리든 안 말리든 고공 투쟁밖에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가족도 말리고 주변에서 다 말렸어요. 당연히 저희도 다 힘들어요. 그런데 '극단적이라고' 말하는 단식이나 오체투지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요. 마지노선이 '고공 투쟁'인 거죠."굴뚝에 올라간 이들은 세 가지를 주장한다. '3승계'라고 물리는 노사합의 이행, 수구 정당·국정원·독점재벌 해체와 노동악법 철폐다.
홍기탁씨는 "3승계가 우선이긴 하다. 그런데 자본가들만 더 돈을 많이 벌게 하기 위해 권력층들이 노동악법을 만들어주는 이 사회구조도 지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촛불로 만들어진 정부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게 수구 정당 아닌가. 이들이 해체되지 않은 것은 민중의 요구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또 총칼과 고문으로 민중을 괴롭힌 구체제의 산물인 국정원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며 "독재정권과의 유착을 통해, 사실상 국민의 세금으로 커왔으면서 세습을 시도하는 대기업들도 해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광호씨 역시 "노동3권이라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조차도 침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차치하고라도 손배가압류 등의 법 조항이 노동자들의 정당한 노조 활동을 가로막고 있다"며 "그밖에 공동건조물침입죄, 업무방해죄, 집시법 위반 적용도 노조를 옭매는 수단이다. 우리는 서울에너지공사(열병합발전소)에 굴뚝을 가동해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에너지 공단은 가동 중단을 이유로 들며 '업무방해'로 고발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한 11년간의 투쟁, 이번에도 기약은 없다. 그들은 매일 굴뚝 위에서 CBS 15층에 있는 스타플렉스를 바라본다. 그러나 스타플렉스는 네 개의 눈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언제쯤 스타플렉스 김세권 대표이사, 그리고 이 사회가 굴뚝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