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번에 우리는 조선시대 초기에 그려진 세계지도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예루살렘을 찾아 보았습니다. 유일신을 섬기는 3대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성지라 주장하며 갈등과 충돌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데, 유일신 대신 유교를 숭상하던 조상들이 지도에 요단강을 그려 넣고, 예루살렘과 나사렛의 지명을 새겨 놓았다니, 선뜻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관련 기사: "
한국의 이 지도를 봐라" 미국 고등학교의 수업 과제)
이번에는 예루살렘 일대의 실제 지리 형세와 강리도(1402)를 대조해 봅니다.
왼쪽 바다가 동지중해, 우측 상단은 카스피해의 일부이고 좌측 하단은 홍해 입구, 우측하단은 페르시아만 입구입니다. 이런 구도와 강리도를 대조해 봅니다.
아래는 예루살렘(붉은 원)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지리 형세입니다. 좌 하단의 탑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지중해는 바다 색깔이 누락되어 있지만 해안선의 윤곽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좌 하단 약간 오른쪽에 보이는 손가락 모양은 홍해 입구, 우상단은 카스피해의 일부, 우하단은 페르시아만 입구입니다. 이를 위의 현대 지도와 대조해 보면 대체로 상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위의 강리도에서 강줄기에 주목해 봅니다. 예루살렘(忽思, 중국어 발음 '후스', 아랍어 지명 quds쿠스, 후스와 상응)으로 흘러드는 요단강, 그 오른쪽 물줄기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입니다. 600여 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붓으로 비단에 그려 놓은 강줄기들입니다.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강리도가 당시 세계상의 대강을 그린 개념도가 아니라, 세계 모든 곳의 지리적 형세와 함께 지리 정보를 망라해 놓은 지도임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제 관점을 달리하여 예루살렘을 그린 다른 문명권의 지도를 살펴 보겠습니다..
맨 먼저 예루살렘을 그린 것은 6세기의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Madaba Mosaic Map)>. 지금 요르단의 마다바시 소재 St. George 성당의 타일 바닥을 장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체는 높이 5미터, 길이10.5미터의 크기인데 많이 훼손되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분의1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아래 지도에서 붉은 사각 테두리로 표시한 곳이 예루살렘이고 그 위쪽에 사해(Deadsea)와 요단강(River of Jordan)이 그려져 있습니다. 중세 서양 지도의 방위는 동쪽이 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과 해가 떠오르는 곳을 위에 놓았기 때문이지요.
위 그림은 예루살렘과 주변 일대의 세부도입니다. 동화 같은 배가 사해에 떠 있습니다. 사해는 예로부터 스파가 유명하여 헤롯왕이 즐겨 찾은 곳이라고도 합니다. 사해의 왼쪽 요단강이 시작되는 입구에 큰 물고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부근이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곳. 물고기 아래 쪽에 그려져 있는 작은 교회는 세례 요한 교회.
"낚싯배, 다리, 사자, 사슴, 물고기, 건축물, 성서에 나오는 도로 등으로 지도가 가득차 있다. 도로들은 로마의 기독교 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의 성서 지명책자 Onomasticon(서기 329)에서 따 온 것이 많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도가 성지 순례자들의 길잡이로서 만들어졌음을 시사한다." (Jerry Brotton <Smithonian GREAT MAPS> 32쪽)이 지도가 그려지던 시기는 아직 이슬람이 역사의 지평 위에 출현하지 않았을 때입니다.그러나 다음 세기(7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슬람이 출현하게 되고 그에 따라 세계사의 지형이 충격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그 일대가 일찍이 7세기에는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 갑니다. 이슬람의 전설에 의하면 마호메드가 예루살렘에서 승천했다고 합니다. 그런 연고로 이슬람교에서는 예루살렘을 메카, 메디나와 함께 자신들의 성지로 여긴다는 것이지요. 예루살렘을 서로 장악하려는 유혈 낭자한 쟁투가 11세기 초부터 13세기 말까지 무려 300년 동안 기독교과 이슬람교 사이에 벌어졌음을 역사가 말해 줍니다. 십자군 전쟁이라 불리는 그 기간 중에 세계 지도의 걸작이 이슬람 사람의 손에 의해 그려집니다. 모로코 세우타 출신의 al Idrisi가 제작한 지도(1154)가 그것입니다.
참고로 중세 이슬람 지도를 볼 때에는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본다는 상상을 하면서 봅니다. 이를테면 해남의 땅끝에 서서 고개를 들어 저 앞쪽의 제주도를 바라본다고 상상해 보는 거지요. 그러면 남쪽이 저 멀리 위쪽에 보이고 나의 발치, 즉 북쪽은 아래 쪽에 위치해 있을 게 아니겠어요.
아래에서 보게 될 이드리시 지도와 강리도는 훗날 원본을 재현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지도들을 통해 각각 1154년의 이드리시 지도와 1402년의 강리도를 보고 있는 것이지요.
다음 지도는 우리가 보기 편한 방향으로 돌려 놓은 이드리시 지도의 부분도입니다. 좌 상단에 알렉산드리아 등대가 지중해 쪽으로 돌출해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오른쪽 아래 바다는 홍해인데 그 위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부분에 집중해 봅니다.
가운데 반원형의 화관에 적혀있는 'kasr(qasr) Ibrahim'은'아브라함의 성/궁/고장'의 뜻.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동 시조입니다. al kuds(예루살렘)의 동쪽 'falestin'은 물론 팔레스타인이고 그 동쪽 '가자(gazza)'는 물론 오늘날의 가자 지구.
우리는 이제 이드리시 지도와 강리도가 공유하고 있는 랜드마크 두 곳을 대조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일강의 수원 묘사입니다. 중세 아랍 지도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나일강의 수원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래 지도는 이드리시 지도의 원래 방향대로 남쪽이 위를 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큰 산맥에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흘러 나와 두 개의 호수로 흘러 든 다음, 다시 흘러 나와 큰 호수로 합류하고 거기에서부터 나일강이 유유히 북상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강리도의 해당 부분입니다.
이제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를 찾아 봅니다. 다음은 이드리시 지도에서 알렉산드리아 등대와 그 주변의 형상입니다. 역시 남쪽이 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강리도의 알렉산드리아 등대와 주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일강의 수원과 아렉산드리아의 등대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들 랜드마크가 서로 다른 문명권에서 저마다 고유한 표현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습니다. 아니, 그 보다도 250년 사이를 둔 동서 양단의 지도가 이처럼 지리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인상적입니다. 두 지도는 또한 시공과 문명권의 차이를 넘나들며 이루어진 지식정보의 교류를 증언해 주고 있으며, 서양이 세계를 재패하기 이전의 세계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서양 중심의 세계사에서 무시되어온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지요.
이 기회에 이드리시 지도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제작자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 봅니다.
AL-SHARIF AL-IDRISI (약1099-1161)이드리시는 지리학자, 여행가, 이집트학학자, 지도 제작자이다. 당대 가장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냈다. 그는 스페인 코르도바의 위대한 무슬림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서유럽을 유람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이드리시는 아프리카 북구 해안의 세우타에서 출생했다. 그의 먼 선조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하마드에 닿아 있다. 그는 1130년대 후반에 시칠리 섬으로 갔다. 당시 그 섬은 노르만족 로저 2세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드리시가초빙을 받아 간 거였다. 로저 왕은 이드리시에게 세계지도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그후 이드리시는 30년 동안을 섬에서 보내면서 지도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는 기독교 문명권, 그리스 문명권, 유대 및 무슬림 문명권의 학문 유산을 망라하여 융합하였다. 이드리시는 여러 지도와 지구의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지리학과 의학에 대한 여러 논문을 썼다. (Jerry Brotton <GREAT MAPS> 47쪽)이드리시는 자신의 후견인이자 희대의 개방 군주였던 로저 2세가 죽자(1154년) 황망히 고향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꿈에 그리던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배신자라는 낙인이었다 합니다. 기독교 왕을 위해 복무했다는 이유로.
이드리시 지도에 우리나라가 신라라는 이름의 섬들(아래 지도에서 왼쪽 바다의 아래쪽 섬들)로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조선 선비들이 그린 지도에이드리시의 모국 모로코가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주요 도시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드리시가 30년 동안 머물렀던 시칠리아 섬도 강리도에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면 믿어지나요?
다음은 카자흐스탄의 눌란 박사의 설명입니다.
"지중해 속 테두리 안에 '撒哈里那(중국어 발음:사하리나)'라는 명칭은 Sicily를 일컫는 아랍어 Siqalia(시칼리나/시할리나)를 옮겼을 것이다. 중국의 옛 지리서 <제번지諸蕃志>에서는 이 섬을 '斯加里野시지아리예'라 지칭하고 있는데 아랍어 Siqalia에서 유래된 것이 분명하다." (Nurlan Kenzheakhmet <The Silk Road 14(2016)> 114쪽)나그네의 탐험 여행은 여기에서 서둘러 마치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기독교권에서는 예루살렘을 어떻게 표현하였는지를 좀더 살펴본 다음, 이어서 바그다드와 카이로의 지명을 탐험해 볼 생각입니다.
이제 한오공의 이야기를 들어 볼 차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오공입니다. 전번에 제 소개는 했으니까 반복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뒤로 미루겠습니다.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죠. 저는 원래 아빠와 대화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지루해서라기보다는… 아버지 이야기는 곧잘 구름 위로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기 때문이죠. 앞으로도 아마 그러실 거예요.
하여튼, 여기 미국 학교에서 우리 고지도를 배우면서부터는 제가 오히려 말을 걸게 되었습니다. 엊그제 학교 끝나고 아버지가 일하시는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Silk Lake Library라나요. 아버지는 거기에서 무슨 연구원처럼 독방을 쓰고 계십니다. 이마에 Map Room이라는 표식을 달고 있는 방에는 지도와 지리서들이 가득하지요.
오공: 아빠, 구글 어스 세계지도 말씀하셨잖아요, 저번에.
아빠: 응, 그랬던가…. 그런데?
오공: 정말 모를 뻔 했어요. 구글 어스 세계지도가 엄청 틀리다는 것을요. 전혀 뜻 밖이었어요. 여기 좀 보세요.
세상에, 러시아(나라가 아니라 지리 공간) 하나만 비교해 봐도 엉뚱하게 크게 그려져 있다니까요. 실제로는 아프리카의 절반 정도 밖에 안된다는데, 여기에는 아프리카의 두 배 보다도 커 보이잖아요.
아빠: 과연 그렇군. 이제 네가 지도를 읽기 시작했구나. 보고도 모르면 까막눈이지.
오공: 아빠, 맞아요. 전에는 똑 같은 지도를 보고도 전혀 몰랐으니까요.
아빠: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면 문맹, 영어로 illitercy라고 하잖냐? 그러면 지도를 못 읽으면 지도맹, 줄여서 '도맹', 영어로 immapancy!
오공: '에이, 아빠.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아빠, 강리도 수업 시간에 얘들이 '한국이 너무 크다. 말도 안돼!' 뭐 그러며 떠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구글 어스 세계지도를 보여주면서 간단히 제압해 버렸죠. '왜 너희는 이렇게 커야 하고 한국은 크면 안 되냐?'
아빠: 오공아, 강리도 좀 다시 보자구나.
과연 절창이로구나. 광활한 북방이 눈에 가득 안겨오는구나. 연암 박지원이라면, 아, 천하의 울음터로다. 가히 한바탕 울어 볼만 하구나 하셨겠지…
오공: ???
아빠: (눈빛이 변하며)
천하 끝까지 뻗어 나간 북방의 저 강줄기라니…
저건 강줄기가 아니다.
우리의 잠을 깨우는 외침이다. 아니, 말발굽 소리다.
지금 저어기 만주 벌판 너머 흥안령 마루턱에 눈이 내린다.
흩날리는 눈발을 갈기에서 털어내며 휘이잉 콧김을 뿜어대는 몽골마가 보인다.
앞발을 들어 올려 질주할 태세로구나.
유라시아 대륙을 한 달음에 가로지를 것이고
머지않아 헝가리 평원에 다다르겠지.
아, 북방의 저 너른 천지가 가뭇이 사라져 버린 것은 언제부터였나.
천하를 압도하는 한반도,
이 기백과 자신감은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
허나, 지금 두 동간 난 산하에서 우리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오공: ???
(*한오공과 나그네의 쌍궤병행(雙軌竝行)은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