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전통자수 명장이지만, 그날의 우연한 사건이 없었다면 김태자의 삶은 뒤바뀌어 있을지 모른다.
제주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취직을 위해 다니던 학원은 타자학원이었다. 1964년여 무렵, 여성의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서 종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잘못 내린 곳이 안국동이었다. 그곳서 보게 된 간판이 '베스타 자수연구소'. 무엇에 홀린 듯 2층 문을 열었을 때, 수많은 또래들이 '빨간 머리 검은 학' 자수를 놓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53년 자수의 이력을 되짚는 전시가 오는 27일 열린다. 전시 준비가 한창인 그를 집이자 작업실인 용산 원효로 산호아파트서 지난 25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수예특기생 제주 비바리, 서울서 운명을 만나다- 전시 제목이 '바늘과 실의 향연-자수'입니다. "10년여 만에 하는 전시예요. 중간에 두 번쯤 기회를 놓쳤어요. 소품은 몇 개 있었지만 대작을 준비하다가, 어느분이 달래서 드리고 말았어요. '태자씨는 또 하면 되잖아!' 하셔서요. 제가 하는 전승전통공예는 유물을 재현하는 목적도 있어요. 몇백 년 지나면 절로 작품이 사그라지니까요. 옛 작품들 보러 일본도 다니고, 연구도 하고 (바빴어요). 학생들 방학인 7~8월, 1~2월에 몰아 작업을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 이번 전시회 작품들이 궁금합니다. "예전에 골무 전시를 한 적이 있어요. 그건 빠졌고요. 바늘꽂이서부터 병풍까지 생활용품하고 궁중자수 병풍도 있어요. 궁에서 하던 전문적이고 분업적인 작업을 궁수라 하고, 민간서 하던 걸 민수라 하는데, 둘 모두가 있어요."
- 우리 전통자수의 공정이랄까,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실은 양잠해서 뽑아낸 명주를 써요. 전에는 염색을 해서 썼죠. 양파껍질도 쓰고, 석류씨도 사용하고, 곤충서도 색을 얻었어요. 홍염이 되려면 홍화가 필요한데, 한 열다섯 번씩 말리고 다시 염색하는 과정을 거치면 채도별로도 얻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과정이 지난하고 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워요. 요즘은 화학염과 자연염을 함께 써요. 전통자수는 손으로 비벼 실을 꼬아 써요. 이 과정을 거치면 결이 분명하고 질감이 도톰한 우리 전통자수가 탄생해요."
자수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손바닥 두 개 만한 작품도 평균 보름이 걸리는데, 대작은 몇 년에 걸쳐 이루기도 한다. 자수가 좋아 시작한 이들도 열이면 겨우 한둘이 남는 이유다. 김태자 명장에게 자수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 어머니가 양장점을 하셨고, 할머니 역시 자수 작업을 하셨다고 보았습니다. "고향이 제주예요, 조천. 내가 다섯 살 때인가, 할머니가 제 두루마리에 자수를 넣어주셨던 기억이 나요. 집에는 자수유물도 꽤 있었어요. 엄마는 내가 중·고등학교 때 제주 칠성동, 지금 중앙로서 양장점을 했어요. 거기서 만드는 옷 단춧구멍은 다 내가 했어요. 시집올 때, 경대포하고 수틀도 갖고 왔어요. 어머니가 그 일을 계속하진 못하셨어요. 부부가 따로 살아야 했으니까, 할머니가 싫어하셨거든요."
- 학교 때 수예에 두각을 보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신성여중, 신성여고를 나왔어요. 고등학교때 반이 학년에 하나였어요. 거기서 두 명씩 여섯 명이 뽑혀서 수녀원 가서 병풍수를 놓았어요. 신부님들은 전부 프랑스서 오신 분들이셨죠. 거기서 수예특기상을 받았어요. 당시 정경자 수녀님이 선생님이셨는데, 이쁨과 칭찬을 받으니까 그게 제 자랑이었죠. 나중에 장관상 받고 기사가 나니까, 연락을 주셨어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를 놓으렴' 하는 말씀이셨어요. 당시 함께 수예를 했던 친구는 의상실을 경영하다 접으려고 했었대요. 제가 대통령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해야지, 계속해야지' 마음을 먹었다고 하고요.
- 첫 자수를 시작하신 인사동의 자수학원에선 어떠셨어요?"숙명여대 가정과를 졸업하신 선생님이 거기 계셨어요. 한 달에 첫째, 셋째 주일만 놀고, 침식제공을 하면서 밤 열시까지 작업을 했어요. 처음 3개월은 실 꼬는 일만 시키는데, 제 실력을 보시곤 바로 나무나 솔잎을 넣는 자수에 투입하셨어요. 수강료를 내는 대신 공임을 받으며 일을 시작했죠."
- 그 후로 자신의 작업장도 따로 내셨죠?"결혼 후에 남편이 사업적인 부분을 도와주었어요. 일본인 바이어하고 연결이 되어서 일본도 가고, 사업 이야기도 하고 친해졌죠. 당시 일본에선 빨간 대나무, 벚꽃과 목련이 든 자수를 집마다 거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한강로 3층 빌딩에 다다미를 깔고 일을 했어요. 일본인 사업가는 알루미늄 액자에 우리 자수를 넣어 가져갔어요."
1992년 예술의 정점과 삶의 계곡 사이에서돈을 잘 벌기는 했지만, '사업'을 한 건 아니었다. '내 작품' '우리 작품'도 마음에 자꾸 걸렸다. 전승공모대전에 눈을 돌렸다. 작품을 준비해서는 스승들께 보였다. 어떤 스승은 "더 기다려라" 했고, 어떤 스승은 "함께 해보자" 했다.
떨어지면 오기가 생겼다. 두 개의 종목에 작품을 내서 두 개의 작품 모두 입선했다. 더 큰 작품을, 더 완성된 작품을 내자고 버텼다. 주문이 들어와도 미루기 일쑤였다. 남편이 그 모습을 보며 한탄했다. 가정적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가 장관상을 탄 것은 1986년, 무형문화재기능이수자가 된 것은 1987년이었다. 1991년에는 전승공예대전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문화재청 조교가 된 것은 1992년. 화려한 이력과 그 이력을 얻기 위한 인고의 세월이 살처럼 흘러갔다. 그러나 가장 높이 날아오른 1992년에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 저가의 중국산 자수 공세에 어려움이 크셨겠습니다. "자수엔 공임이 많이 들어요. 대작은 여러 명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작은 소품도 손품은 마찬가지고요. 임금을 맞출 수가 없었어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그 공세의 뒤에는 한국서 미리미리 준비해 들어간 '한국인 사업가'들이 있었어요. 이렇게 저렇게 만드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팔 거다 하는 사업계획을 갖고 있으면서 사업을 확장한 거예요. 가족들이 먹고살 회사를 만든 거죠. 나는 그런 사업수단이 없었어요. 1995~1996년도 쯤에 가면 우린 거의 다 손을 들었어요. '그렇게 싸게 하실 데가 있으면 거기서 하세요' 했죠."
'좋은 시절'은 갔다. 집에서도 '좋은 엄마'로 남지 못했다. 집에 오면 늘 일하는 엄마였으니까. 아이들에게 걸맞은 교육과 관심을 기울여주지 못했다. 수완이 없어 사업을 만들지 못했고, 주문도 거부해서 돈도 충분히 벌지 못했고, 일을 도와주던 남편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포장마차라도 해서 김밥을 만들어 팔까도 생각했다. 그를 격려해 다시 제자리로 돌려낸 것은 자녀들이었다. 엄마의 일과 삶을 응원해준 것이었다.
- '한국 전통자수의 양식적 특징'으로 논문을 쓰셨습니다. "그건 많이 부족하지요. 나름대로 제가 해온 전통자수가 무엇이었나를 다른 분들과 나누기 위해서 쓴 거였어요. 대학에서도 가르치고, 함께 전시도 열고 거기 관객분들이 오시는데 함께 나누어야 하잖아요. 전통자수는 문양마다 다른 기법으로 제작되는데, 그런 부분도 정리를 했지요. 제주도 비바리(여자)라서 그런가, 요청이 오면 거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참석하고 배우고 익혀온 결과를 담고 싶었어요."
- 뉴욕의 아트앤디자인뮤지엄에서 워크숍하신 사진이 있습니다. "숙명여대에 정영양 자수박물관이 있어요. 그곳 정영양 선생님이 뉴욕서 초대해 주셨어요. 한쪽 벽면에는 전통자수를 전시하고, 중앙에 틀을 놓고 전통자수를 실연했어요. 구경하다 질문하고 같이 배웠죠. 덩치 큰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보여준 관심이 제게도 큰 자극이 되었어요. 포르투갈이나 일본 같은 데서의 그룹전시 같은 데서도 역시나 느꼈던 거지만요."
-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80호 한상수님의 전수교육조교로도 활동 중이십니다. 후학 양성이 현재로는 가장 큰 일이시죠? 마음도 많이 가고요."요즘의 젊은 친구들은 솜씨가 대단해요. 다들 많이 보고 배운 이들이잖아요. 몇 년 배운 기능인을 금방 따라잡아요. 디자인적인 감각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함께 있으면 저 스스로 늙었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하게 돼요. 현재로선 숙대 박물관 특설교육원과 강남의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가장 큰 일이죠. 그리고 평생 살아온 여기 용산에도 공예관이 세워졌어요. 거기서도 봉사 겸, 중앙박물관이 있는 곳이니 문화기여 겸, 여력이나마 보탤 생각이에요."
길을 잃고 길을 찾았던 곳에서 전시회를 열다김태자 명장의 집은 실과 바늘과 가위 그리고 한 바늘 한 바늘 땀을 뜬 자수 작품으로 가득했다. 격자로 된 미닫이 창호를 열자, 가득 자수를 수놓은 베개들이 보였다. 100여 개 베개 옆으로는 문갑장도. 김태자 명장에겐 배우려는 열망 가득한 유능한 제자들 그리고 미술을 전공한 그녀의 첫째 딸도 자수를 이으려 배우고 있다. 전통자수를 잇는다는 자부심과 의무감은 그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자수제석탱(김태자 작, 1986. 평수 명주실, 93×69.6,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처럼 불교탱화를 자수로 재현하고자 하는 과업들까지. 1944년생 김태자 명장에게 2017년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 한 바늘 한 바늘 지을 때마다, 소망과 기원을 담는 것이 자수라고 하셨습니다."삶이 꼭 순탄한 것만이 아니잖아요. 굴곡이 있었죠. 자수를 할 때, 마음이 들뜨면 절대 자수가 되질 않아요. 한 땀 한 땀 정성이 담겨야 자수가 되죠. 아니면 다 끝나더라도 다시 풀어내야 할 때도 있어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수를 넣어요. 새 꽃 나비 열매가 갖는 상징성을 따라 자수를 짓다 보면, 완성할 즈음 어느새 거기 소망도 함께 짜여있는 거죠."
그의 소망과 50여 년 내공이 엮어온 자수를 오는 12월 27일부터 31일까지 5일간,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만날 수 있다. 김태자 명장이 어릴 적 길을 잃어, 길을 찾게 된 그곳 안국동과 가까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