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빌딩 안에 사무실이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빌딩 내부는 물론 그 주변까지 당연히 속속들이 잘 알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되려 조금 떨어진 건물에 사무실이 있는 친구가 그 빌딩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그 친구에게 물어 봤습니다. 그 친구는 직장이라는 구속감 때문에 빌딩 내부는 물론 주변까지를 살펴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명산대천에 사는 사람 또한 그럴 겁니다. 계곡에 살고 있으니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는 낙락장송의 풍치 정도는 시시콜콜할 정도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계곡이 춘하추동으로 명산대천과 어우러지며 연출해 내는 장엄한 아름다움은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만큼은 실감할 수 없을 겁니다.
불교나 기독교를 종교나 신앙이라는 우산으로 쓰고 있으면 빌딩에 갇힌 것 같은 속박감이 들 때도 있고, 답답함이 느껴질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발 뒤로 물러나 이들 교리를 담고 있는 성경이나 불경을 종교가 아닌 인문학, 신앙이 아닌 고전쯤으로 새기다보면 그 그늘에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 까지도 두루 아우르며 보게 될 거라 생각됩니다.
인문학으로 새기는 불교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지은이 김사업, 펴낸곳 불광출판사)에서는 불교의 고갱이라 할 수 있는 핵심개념,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수가 될 핵심들을 종교나 신앙이라는 관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충분히 이해하며 새길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종교인 주변사람들에게 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어떤 이는 '심(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심'이 뭐고, '공'이 뭐냐고 이어 물으면 한참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알 듯 말 듯 합니다. 감은 어른거리는데 언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래서 불교가 어렵고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불교를 한마디로 나타낼 수 있는 '공空'을 좀 더 쉽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변이야기로 풀어 설명하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생활 속 과학으로 입증해 들려준다면 헛갈릴 내용도, 난해할 용어도 아닐 것입니다.
부파불교의 연기 이해, 그리고 초상집의 예와 같이 우리들의 통상적인 연기 이해에는 오류가 있다. 대승불교에 들어와 이 오류를 시정하고자 '연기'라는 용어 대신에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기존의 부파불교에서 사용되던 '연기'라는 동일한 용어로는 올바른 연기를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문통찰>, 70쪽-책에서는 뒤이어 "'공'은 모든 사물에 자성이 없다는 것, 즉 무자성(無自性)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공=연기', '공=무자성'이므로 설명인즉 '공=연기=무자성'이 됩니다.
따라서 '연기'와 '무자성'을 이해하게 되면 그게 곧 '공'을 아는 게 됩니다. '연기(緣起)'를 요즘 개념으로 쉽게 설명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조건에 따라 생멸한다는 것입니다.
태고부터 당연히 있었을 것 같은 지구도 빅뱅이라는 조건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인간 개개인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도 원래부터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만났다는 조건, 임신 가능한 상태가 됐을 때 사랑을 나눴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일어난(起) 존재입니다.
인간의 몸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물질이 다 그렇습니다. 물도 두 개의 산소와 하나의 수소라는 조건, 수소결합이라는 조건이 충족될 때 존재(생성)합니다. 다른 물질 역시 분자구조를 만족시킬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춰져야만 존재합니다.
공=연기=무자성한번 만들어 졌다고 영구불변으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태어날 때의 조건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조건에 따라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하고 있습니다. 심장에 있던 피가 전신으로 이동하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포가 끊임없이 생멸합니다. 따라서 절대 불변의 상태(존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조건이 달라지면 달라집니다. 금속만 해도 우리가 보기엔 항상 그대로인 것 같지만 미소단위로 살펴보면 자유전자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주변 환경에 따라 산화하고 환원하며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원래 가지고 있는 자성, 영구불변인 자성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무자성입니다.
의심하고 미개한 마음으로 보면 말장난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주 작은 변화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초감각 센스를 바탕으로 해 살피다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진실이 될 것입니다.
공(空)은 결코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고 헷갈릴 거리도 없습니다. 수학에서 어떤 조건을 'X'라고 표현(가정)하는 것처럼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 과학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사실을 단지 '공'이라고 표현할 뿐입니다.
그러함에도 아는 것을 얼마나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불교를 종교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행동으로 옮겨야 할 몫입니다. 알게 된 공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불교를 종교로 하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신앙생활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불교를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 선입하게 하는 '공', '화두', '윤회', '열반' 등을 새기다보면 어떤 고전에서도 취할 수 없었던 소양을 인문학적 향기로 물씬 느끼게 될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 지은이 김사업 / 펴낸곳 불광출판사 / 2017년 12월 18일 / 값 1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