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겨울밤, 벌써 50일 넘게 국회 앞에 누운 두 사람이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 한종선씨다. 수년 전 꽤나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이미 다 해결된 거 아니냐고 묻지만, 그들은 그런 말을 듣는 게 상처라고 했다. 그들이 또다시 국회를 찾은 사연을 연속해 싣는다. [편집자말] |
[지난 기사] "경찰이 14살 학생 성기 라이터로 지지고... 바뀐 게 없습니더" "피해자를 피해자로만 보지 마라고요."안경 너머로 번득이는 그의 눈빛엔 날카로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언론이고 시민단체고, '아직도 피해자 너희들은 좀 불쌍해져야 돼', 이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대부분 그들이 앞에서 바리케이드 딱 치고 피해자들은 그 뒤에서 말도 잘 못하는 사람들처럼 비치잖아요. 피해 당사자 운동이라고 하면 좀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도 있고.""물론 언론과 시민단체에 늘 감사하지만"이라고 덧붙이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42)씨다.
텐트 속 불호령
국회 앞 노숙농성 51일째였던 지난 2017년 12월 27일 밤, 또 다른 피해생존자 최승우(49)씨와 텐트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찌이익-'파열음을 내며 비닐텐트의 지퍼가 내려갔다. 바깥의 찬공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한씨였다. 다듬지 않아 덥수룩한 수염에 드문드문 성에가 낄 정도였지만 그는 입버릇처럼 "춥긴 뭐가 추워. 하나도 안 추워. 하나도 안 힘들어"라고 말했다. 그는 자존심이 셌다.
"어떤 부류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로 돈을 벌어요." 그의 말은 처음부터 어딘가를 쿡 찔렀다.
"그렇게 해서 흥행이 되면 사람들은 문제가 다 해결된 거라고 생각하죠. 이제 다 된 거 아니냐고. 근데 그게 우리 같은 피해자들한테는 얼마나 상처인 줄 알아요? 실질적으론 나아진 게 하나도 없는데."피해 생존자로서는 처음 전면에 나서 이미 여러 차례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 부산 형제복지원의 참상을 전한 그였지만 "3년 전 화제가 됐던 방송에서도 쥐 잡아먹은 얘기만 나오더라"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시각들이 불편하죠. 마이 불편하죠. 제가 무슨 삐딱한 마음으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 말하다 보니까 또 흥분하는데... 피해 당사자들의 이야기 자체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여달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대구 희망원 사건이나 경기도 안산 선감학원 사건 같이 계속 비슷한 일들이 뒤늦게 밝혀지고 있는 거 아니에요? 피해자들이 그렇게 얘기했었는데..."그는 여전히 할 말이 많았다.
"도가니 사건도 봐봐요. 책도 나오고 영화도 나오고, 다 엄청 인기였죠? 국민들 관심도 크게 받아서 관련 법도 통과됐죠. 근데 정작 피해자들 삶이 달라졌어요? 아니거든요. 그 후로 또 방치된 채 살아가는 피해자들은 아이 기저귓값도 감당 못 하면서 사는 경우가 태반이라고요. 형제복지원 경우엔 아직 진상규명조차 안됐으니 말할 것도 없고."분노
세상을 향한 그의 분노는 그래도 많이 누그러진 거라고 했다. 끈을 놓지 않고 관심을 가져준 시민들 덕이었다. 예전에 길가에서 시위를 할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 다 죽여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라던 그였다. 9세였던 1984년, 그는 아버지 손에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보내졌다.
"아버지가 내랑 누나하고 하루종일 부산 시내를 구경시켜준 다음 저녁 한 8시쯤 파출소에 데리고 갔어요. 아버지가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나갔는데 바로 형제복지원으로 가는 차가 오더라고요. 위탁종용된 거죠. 이미 얘기가 다 돼 있었던 거예요."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벽으로 둘러싸인 복지원에서는 매일같이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가 맞는 것보다 12살 누나가 미쳐가는 걸 보는 게 더 힘겨웠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가장 역할 한답시고 가뜩이나 책임감 강한 누나였는데, 복지원에서 동생이 맨날 두들겨 맞는 걸 보면 어디 제 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조장이란 놈들은 누나 성기에다가 이상한 막대기 같은 걸 쑤시면서 고문하지, 툭하면 묶어놓고 성폭행하지, 원치도 않는 의학약품 같은 거 갖다 먹이지, 미치지 않고 그 생활을 어떻게 버티겠어요."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시 북구 주례동에서 운영되던 '복지시설'이었지만, 실제로는 거리의 부랑자들을 감금해 구타, 학대, 성폭행, 인권유린, 강제 노역을 자행하던 '강제수용소'였다. 12년 동안 형제복지원에 강제 입소된 사람은 4000명에 달하고, 공식적으로만 513명이 사망했다. 박인근 당시 형제복지원장은 수용자들을 이용해 10억 원이 넘는 국고보조금을 횡령했다.
누나
1987년 초, 3년여 만에 급작스레 서울의 한 고아원으로 전원 조치되면서 형제복지원을 떠난 그는 고아원 출소 후 "노가다, 집창촌 관리, 구두공장 일, 중국집 배달, 신문 배달, 성인오락실 관리, 온라인 게임 작업소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라고 읊었다.
"사기도 많이 당했죠. 고아원 나오자마자 구두공장에서 3년 동안 일했는데 돈은 나중에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달에 5만 원씩만 받고 일했어요. 일 잘한다고 사장이 잘해주니까 나는 그게 그냥 좋았거든. 딴 데서 돈 많이 줄 테니 오라고 해도 안 갔어요. 그땐 돈이 뭔지도 몰랐고. 3년 쯤 지나고 이제 어느 정도 돈이 모였겠다 싶어서 사장한테 누나랑 아버지 찾으러 갈 테니 맡겼던 월급 달라니까 콧방귀도 안 뀌대. 결국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만 받아 들고 나와서 무허가 연립주택에서 자면서 살았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둠의 생활을 하게 됐죠. 그 후로 교도소도 몇 번 왔다 갔다 하게 되고."새로운 삶을 다짐한 그는 '어둠의 생활'을 접고 공사장 인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던 2007년, 작업 현장에서 일을 하다 허리를 심하게 다쳐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누나와 아버지의 연고를 알게 됐다. 꼭 20년만이었다. 누나와 아버지는 모두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누나는 결국 그렇게 된 거였고... 아버지도 죄책감 때문인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누나랑 아버지를 만나면서 생각한 게 있어요. 아, 싸워야겠구나. 이건 뭔가 잘못됐구나. 내가 직접 나서서 싸워야겠구나."그는 '직접'이라는 말에 유독 강세를 줬다. 대화 내내 '피해자 당사자 운동'을 강조하던 그였다. 실제 그는 5년의 준비 끝에 2012년부터 1인 시위, 기자회견, 노숙농성, 단식, 삭발, 피해자 증언집 발간 등을 주체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다. 집도 광주로 이사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참혹한 국가 폭력을 당사자들은 어떻게 극복하고 치유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형제복지원도 내무부 훈령 제410호(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에 의한 국가 폭력이잖아요. 광주는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광주는 민주화라는 위대한 명분을 가졌지만, 우리들은 명분도 없고 의미도 없이 그저 사회 쓰레기로 낙인 찍힌 사람들인 거죠."끝없는 '끝'
- 그래서 언제까지 여기 계시려고요."끝까지. 이번엔 무조건 끝까지 갑니다. 법안 통과될 때까지. 여러 번 해봤는데, 그때마다 국회의원 보좌진이나 관계자들이 와서 말해요. 잘 될 거라고, 잘 되지 않겠냐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들어가라고. 그렇게 매번 돌아갔어요. 그래서 된 게 있었어요? 이번엔 무조건 끝까지예요."
- 너무 추우실 것 같은데."안 춥다니까요! 흐흐. 춥고 덥고 따지면 언제 싸웁니까. 국회의원들이 쳐다보든 안 보든, 우리가 여기서 진상규명, 법안 통과 안 외치면 누가 외쳐요. 끝까지, 끝까지 할 거라니까요."
그는 지난 2017년 12월 6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에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권고를 표한 것 또한 이번 노숙 시위 덕분이라고 했다. 암울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변화하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아주 아주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몇 년 전만 해도 이 사건 누가 거들떠나 봤어요? 피해자들이 직접 얘기하기 시작했잖아요. 쓰레기 취급이나 받던 피해자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내가 왜 그렇게 끌려갔냐고, 왜 구타 당했고, 왜 성고문을 당하며 미쳐야 했는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잖아요. 근데 저 국회에선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쟁점 법안이 아니거든요? 인권 앞에 여야가 있습니까? 이건 서로 협의 못할 것도 아닌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도대체."형제복지원 진상규명과 관련된 '내무부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법'(형제복지원 특별법)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정리법) 등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말을 쏟아내던 그는 컵라면 한 사발을 뚝딱 비운 뒤 잠자리에 누웠다. 대화 내내 하나도 안 춥다던 한씨는 그날 새벽 추위에 치통이 도져 응급실에 다녀와야 했다. 그는 아직 국회 앞에 있다.
*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