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원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교실 문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캘빈총을 메고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이 "왜 왔어 임마"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15세 소년 이세찬이 군인에게 아버지 만나러 왔다며, "꼭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했다. "이문구, 이문구 나와!"라는 고함에 이어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맥고모자와 쌈지를 주었다. 아버지가 "갖고 올라 가거라"고 한 말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터벅터벅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어제 갇혀있던 보도연맹원 중에 한 명은 도망가다 총 맞아 죽고, 한 명은 도망갔다네"라는 말이 들렸다. 노심초사하며 잠을 설친 이세찬(83세, 청주시 용담동, 충북유족회 회장)씨는 다음 날 미원초등학교로 갔다. 하지만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교 근처에서 서성만씨를 만나, 아버지 행방을 물으니, "걱정하지 마라. 3일 후에 돌아오실 테니, 그때 와라"고 해,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68년 동안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유당이 좋으냐, 공산당이 좋으냐?"이세찬씨 부친 이문구씨가 미원초등학교에서 트럭에 실려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이유는 보도연맹원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이문구씨는 좌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다. 아니 좌익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우익이었다. 미원면 중리 대한청년단 단장을 맡았던 것이다. 이문구씨 사촌형 이명구씨는 중리 구장(이장)을 맡아 마을 일을 봤는데, 사촌동생한테 "어제는 어디서 모임을 했니?"하고 물어봤다. 장성거리 느티나무 아래서 했다고 하니, 무슨 말이 오갔는지도 물어봤다.
미원에서 온 사람이 "공산당은 토지분배도 하고, 평등하게 사는 거고, 자유당은 지금같이 사는 거다. 자유당이 좋으냐, 공산당이 좋으냐?"며 참석자들에게 물어봤다. 참석자 중 부유한 사람들은 자유당이 좋다고 하고, 소작인들은 공산당이 좋다고 했다. 이때 공산당이 좋다고 손을 들었던 소작인들이 남로당에 가입되었던 것이다. 후에 이들은 자동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이세찬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직후 미원에서 온 사람이 토지개혁을 이야기하며, 정당선호도를 주민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유당이 존재하지 않았고, 공산당 역시 해산되고 남로당으로 조직재편이 이루어진 시점일 것이다. 즉 정확한 표현은 "한민당이 좋으냐, 남로당이 좋으냐?"일 것이다.
감자밭에 감자랑 바구니만 나뒹굴어1950년 여름 아버지는 감자를 캐느라 머리를 땅에 묻고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서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세찬이 감자밭에 가보니, 감자랑 바구니만 나뒹굴고 있었다. 잠시 후에 당숙모가 와서 어머니에게 "동서, 서방님이 감자 캐다 말고 지서에 가셨어" 하는 것이 아닌가! 지서에서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버지한테 중의적삼 갖다드리라고 했다. 이세찬은 옷 보따리를 들고 지서로 갔으나 아버지는 안 계셨다. 인근 사람들한테 물었더니 지서 앞 송기식씨 집에 계신다고 했다. 중의적삼을 전달할 때만 해도 다음날 아버지가 죽음의 골짝으로 끌려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다음날 면소재지에 내려갔는데 아버지는 온데 간데 없었다. 미원초등학교로 가 보니 교실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도 하나도 없었다. 전날까지 미원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던 수 십대의 GMC트럭도 한 대도 없었다. 주변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GMC트럭 3~4대 조금 전에 보은방향으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1개월이 지났다. 아버지의 생사를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차에,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아치실에서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세찬 할머니 유인문(당시 65세)씨는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러 갔으나 이내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일백 여구가 넘는 시체가 부패해, 배가 남산 만하게 솟아오르고, 벌레와 들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 아들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찾기를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저 놈 안 죽었다, 더 쏴라"보도연맹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는데 분주소(북한군 점령시절 지서의 명칭)에서 연락이 왔다. 서성만에 대한 인민재판을 한다는 거였다. 이세찬 증언에 의하면 서성만은 미원면 보도연맹 책임자로,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시 본인은 몸을 피하고, 다른 사람은 전부 죽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유족들 입장에서는 보도연맹원 학살을 지시한 정부와 군 책임자, 그리고 학살을 집행한 군인과 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또 그들을 대상으로 한풀이를 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앞에 서성만이 분주소에 끌려 와 엎드려 있었다. 유족들은 일시에 분통을 터뜨렸다. "저 놈 때문에 다 죽었다", "저 놈 죽여라"며 외쳤다 인민재판은 간단히 끝났고, 북한군이 서성만을 오병천 병막으로 끌고 갔다. 유족들과 주민들은 숨도 쉬지 않고 따라 갔다 "탕탕" 인민군이 권총을 발사했다. 유족들이 외쳤다.
"저 놈 안 죽었다. 더 쏴라!!!"80세 노인이 유해 들고 충북도청 찾아간 이유2014년 10월 23일 충북지역 유족 약 50명은 충북도청 서문에 모였다. 그들 손에는 "충청북도는 아곡리 유해 발굴 실시하라"는 손 피켓이 들려 있었다. 이세찬은 다른 유족들과 함께 목청을 높였다. 이시종 충북도지사를 면담해, 아곡리에 묻혀 있는 유해 발굴을 해달라고 요구할 작정이었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3년간 유해 발굴을 했지만 전국적으로는 11곳만을 했을 뿐이다. 더군다나 충북에서는 청원군 남일면 분터골만 했다.
2시간의 시위 끝에 도지사 집무실에 유해상자를 들고 갔지만, 도지사를 만날 수는 없었다. 몇 주 후에 이시종 도지사를 만났다. 이세찬과 충북지역 군 단위 유족회장 5명이 면담을 했다. 지자체가 유해 발굴에 앞서달라는 유족들의 요청에 이 지사는 "유해 발굴은 정부에서 할 일이니, 도내 국회의원들에게 건의하겠다"라는 무책임한 답변을 내놨다. 충남과 경남의 경우 지자체가 유해 발굴을 실시한 전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지사의 무책임한 답변이 있은 지 3년여가 지났지만 유해 발굴 소식은 감감무소식이다.
1주일에 한 번 국회의원회관을 찾아가다이세찬씨는 충청북도로부터 푸대접을 받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과거사법 개정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2017년 11월과 12월에는 1주일에 한 번 꼴로 국회의원회관을 찾았다. 여·야 국회의원들을 만나 과거사법 개정을 요청하고 있다. 아곡리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유해를 찾았으면 하는 염원에서다. 하루속히 과거사법이 개정되어, 이세찬씨의 눈가 주름이 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