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대학교 신약학 김철홍 교수가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를 다룬 영화 <1987>를 주제로 한 칼럼에서 고 박 열사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이 인민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극우성향 매체인 <펜앤드마이크> 5일 자 기고 칼럼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매체의 발행인은 정규재TV 진행자인 극우 논객 정규재씨이고, 김 교수는 객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김 교수는 '1987년 실제와 영화, 그리고 2017년'란 제하의 칼럼 서두에서 이렇게 적었다.
"1987년에 심겨진 씨앗이 30년 동안 자랐고, 그 결과 우리는 2017년을 수확하게 되었다. 도대체 1987년에 무엇이 심겨졌기에 30년 후 우리는 대통령 탄핵과 친북·친중 성향의 정부를 맞이하는 쓴 경험을 하게 되었을까? 영화 '1987년'은 나를 30년 전 역사의 그 자리로 데리고 가서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한 수 한 수의 복기를 통해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김 교수는 이어지는 글에서 고 박종철 열사가 제헌의회그룹에 속했었다며, 그의 운동이 순수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박종철군은 당시 학생 운동권 안에서 '제헌의회그룹'(Constituent Assembly Group)이라고 불리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85년 2월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양(兩)김씨의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되고 이들이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개헌국면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헌의회그룹'은 직선제 개헌투쟁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직선제 개헌 투쟁은 결국 정치적 주도권을 쁘띠부르주아 세력인 신민당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략) 박종철군이 속한 '제헌의회그룹'은 러시아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파쇼 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라는 구호(slogan)을 채택하고 86년 5월부터 혁명투쟁의 전위부대가 되어 비타협적인 선도적 투쟁을 시작했다."김 교수는 이 같은 점을 지적하면서 고 박종철 열사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건 인민민주주의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화 <1987>이 이 같은 점을 생략했다고 비판했다.
"박종철군도, 그리고 그를 고문해서 검거하고자 했던 박종운(서울대 사회학과 81학번)군도 사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인민민주주의였다. 그들은 '대학문화연구회'라는 지하서클 소속이었고, 그들의 구호는 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했고, 볼셰비키 혁명을 모델로, 레닌을 롤 모델(role model)로 하여 공산혁명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제헌의회 그룹은 당시 주사파(NL파)와 대립하고 있던 영향력 있는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당시 20대의 어린 나이였다는 것과 전술 선택의 미숙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당시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고 보인다. 그러나 영화 '1987년'은 이런 점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김 교수는 이어 1986년 당시 서울대 미생물학과 83학번 김세진과 정치학과 83학번 이재호 두 학생이 전방 입소 교육에 반대해 분신한 사실을 들면서 '이 사건 이후 주사파가 학생운동을 장악했고, 주도권을 장악한 주사파가 고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직선제 개헌 투쟁에 적극 활용했다'는 식의 주장을 이어나갔다. 김 교수의 주장은 아래 대목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렇다면 87년 6월 항쟁의 승자는 누구였고 패자는 누구였나? 얼핏 보면 군사독재정권이 패자고 넥타이부대를 포함한 민중이 승자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하지만 6월 항쟁을 운동권 내부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진정한 승자는 주사파였고, 진정한 패자는 넥타이부대를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었다. PD 계열도 그때 NL에게 밀린 이후로 지금까지 기를 못 피고 있다."김 교수는 "좌파들이 교육을 장악하고 생산라인에서 좌파이념에 친화적인 세대를 끝없이 만들어낸다"며 "자유민주 세력은 그동안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 경제 제도를 지키기 위해 자라나는 세대에게 지속적으로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깊이 있게 가르치지 않았던 점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김 교수의 극우성향 행보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 교수는 2016년 장신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숨진 고 백남기 농민을 "민주열사가 아니라 민주노총이 주도한 반민주적 불법시위에 참여한 범법자"로 규정하는가 하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을 "80년 광주사태로부터 이어져 온 친북세력의 공산국가 수립 시도"라며 촛불집회를 폄하했다.
김 교수는 또 2017년 2월 자유경제원 특강에서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킨 민주화 운동 당시 대세는 주사파였다. 주사파는 운동권의 70~80%, 노동운동을 장악했다"는 식의 극우 발언을 쏟아냈다. <펜앤드마이크>에 실린 김 교수의 칼럼은 이 같은 극우 행보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다.
김 교수의 주장에 대해 장신대 구성원은 물론 외부에서도 비판이 일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장신대 학생 A씨는 "그분 빼고는 모두 아는 진실을 어서 바로 아시고 회개하셨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장신대 B교수는 "김 교수가 6월 항쟁이 주사파의 승리라고 하는데, 그 주장대로라면 진작에 북한화 됐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되물었다. 이어 "6월 항쟁을 전형적인 분단고착분열 증세로 읽는 그들의 시선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6월 항쟁이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승리로 정리된 이상 김 교수류의 주장은 억지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삼청교육대 최장기수 출신인 민통선평화교회 이적 목사도 10일 오전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학자라면 주사파의 운동을 학문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매카시즘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 이는 6월 민주항쟁에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 폄하하려는 못된 시도"라고 꼬집었다.
덧붙이는 글 | 기독교 인터넷 신문 <베리타스>에 동시 송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