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영화 <1987>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지금, "민주화 격변기도 다 지난 그때 학생운동을 시작했으면서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며 또 누군가는 비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모두 그렇지는 않다.
나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89년 3월의 일이었다. 첫날 첫 시간이었다. 나는 노란 햇살같은 기대감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신입생으로서 푸르렀던 자부심은 이내 참담한 패배감으로 무너졌다. 담임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서더니 별 인사도 없이 그냥 칠판으로 돌아서더니 뭔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그런 교수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랬다. 우리가 숨죽이며 바라보던 교수가 쓰기 시작한 내용은 다름 아닌 '강의 시간표'였다. 대학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교과목을 '자기가 정해서 수강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감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강의 시간표를 마주하며 '나는 내가 입학한 대학이 어떤 곳인지' 한꺼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모두가 그 뜻을 알아채고 아무 말 없이 나눠준 수강 신청서에 따라 적고 있는데 한 학생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이다.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대학에서는 자기가 과목을 택해서 신청하는 것으로 아는데 왜 일괄적으로 써야 하나요?"그 말에 모두가 쓰던 손을 멈췄다. 우리도 묻고 싶었지만 알아서 판단해 볼 때, 그 바보같은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민망하여 그만 둔 물음이었다. 과연 교수는 뭐라고 할까? 교수는 백묵으로 적어가던 판서를 멈췄다. 그리고 이내 돌아서며 질문한 학생을 향해 무감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학교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이 학교는 강의실도 부족하고 교수도 부족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여기 시간표대로 다들 받아 쓰면 된다."교수의 입에서 그런 답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 말을 그렇게 꺼낼 줄은 정말 아무도 몰랐다. 자존감이 땅으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교수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겠다. 여러분들도 듣기 싫겠지만 여러분이 이 학교를 온 것은 성적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 사실 아닌가. 나 역시 이 학교 보다는 서울에 있는 스카이(서울대, 고대, 연대)에서 교수를 하고 싶지만 실력이 부족해서 이곳에 온 것이고......"그 말에 아이들은 차마 눈을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 날의 기억은 그후 30여년의 시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사건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교수는 또 말했다.
"그러니 이 학교까지 와서 괜히 데모하니 마니 하면서 나대지 말아라. 공부 못해서 여기 왔는데 데모한다고 앞장서다가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감옥가면 부모님만 괴롭히는 일이다. 데모도 서울대, 연대, 고대 같은 학생들이 해야 알아주지, 너희같은 애들은 해 봐야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알겠나."교수의 말은 하나 하나 칼이 되어 그대로 내 가슴에 박혔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화가 났다. 내가 못한 것은 '정답을 맞추는' 공부였다. 그런데 그 이유만으로 '데모할 자격조차 없다'는 말에 나는 더할 나위없는 치욕감을 느꼈다.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분노가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막걸리 한잔이 부른 학생운동의 길
강의실을 박차고 나선 나는, 학교 운동장을 질러가면 나타나는 구멍가게로 향했다. 구멍가게에서는 생두부 한 모에 막걸리를 저렴한 이문을 남겨 팔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막걸리 2병을 시켜 들이켰다. 그러면서 그 교수의 망언을 두고 되씹고 씹으며 속으로 욕을 해댔다. 나는 그 교수에게 뭐가 되었든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복수의 방법이 무엇인지 잡히지 않았다. 화는 나는데 길이 없었다. 그렇게 혼자 막걸리 2병을 들이킨 후 나는 불콰해진 기분으로 다시 휘적 휘적 학교로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매점 앞 가로대에 누군가가 붙인 대자보가 눈에 띄었다. 대자보는 정말 길고 길었다. 그 긴 글이 담긴 대자보를 나는 한 장 한 장 따라가며 읽었다.
그랬다. 바로 내가 찾고자 했던 길이었다. 대자보에는 내가 다닌 학교의 비리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강의실이 부족한 이유도, 우리를 가르칠 교수가 부족한 이유도 써 있었다. 사실은 우리가 낸 등록금이 다른 학교에 비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설립자의 이익을 위해 빼돌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빼돌린 돈으로 채 10년이 안 되어 무려 6개가 넘는 또 다른 학교를 설립자가 소유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었다.
나는 대자보의 격문을 읽으며 크게 공감했다. 그 공감이 생두부 한 모에 막걸리 2병을 마신 취기에 뒤 섞이며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비합법 운동권 조직에 가입하겠다는 원서에 사인을 했다. 나는 비로소 내 분노의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행복해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돌이켜 봐도 그날의 그 행위는 '객기'였다. 술이 깬 후 나는 내가 취중에 선택한 그 일이 얼마나 큰 용기와 희생을 담보로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단 한시도 행복할 수 없었다. 1989년 당시 내가 다닌 대학은 거대담론의 고민보다 더 어려운 난관이 있었다.
바로 운동권 학생들을 탄압하는 학내 폭력배의 가혹한 매질이었다. 학교는 학내 문제를 비판하는 세력을 탄압하고자 조직폭력배 두목을 학생으로 영입했다. 그리고 그렇게 입학한 조폭 두목은 자신의 조직원을 학생회장으로 앉힌 후 학생회비를 빼돌리고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우리에게 쇠파이프와 각목을 주저없이 휘둘렀다.
뿐만 아니었다. 어느 날은 녹이 슨 낫을 휘둘렀고 또 어느 날은 차량에 일본도를 가지고 나타나기도 했다. 상상 그 이상의 무법천지가 계속되는 가운데 끔찍한 불행은 1990년 3월에 일어났다. 그날 우리들과 함께 잘못된 학내 현실을 바꾸고자 싸웠던 동료가 찬비 내리는 3월 새벽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90년 당시 만 24살의 청년, 김용갑이었다.
죽음의 공포, 그때 만난 사람이 길이 되다당시 경찰은 김용갑의 죽음에 대해 단순 교통사고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사건 당일 우연히 발생한 뺑소니 교통사고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김용갑이 죽기 일주일 전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다. 우리들의 저항을 주시하고 있던 폭력배중 한 명이 김용갑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는 이런 협박을 했다.
"나는 나를 배신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차로 갈아 죽여 버릴 것이다. 차로 갈아도 과실치사로 6개월이면 풀려 나온다. 죽고 싶지 않으면 배신하지 말라."'학생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차로 갈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우리는 그 말을 전해 들으며 그냥하는 소리라고 여겼다. 늘상 있었던 협박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협박 발언이 있고 난 후 정확히 일주일 후, 김용갑은 정말 그 예언처럼 '뺑소니 교통사고에 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예언은 사망 원인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건 발생후 경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농성에 돌입하자 이내 범인은 검거되었다. 그리고 검거된 범인이 사실은 폭력배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교직원과 도박판에서 서로 알고 지낸 관계라는 점이 드러났다. 의구심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교직원이 바로 김용갑 사망 일주일 전, 문제의 협박을 한 사람이었으니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또 하나의 예언이 현실에서 드러난 것이다. 차로 갈아 죽여버리겠다는 말이 현실에서 맞은 것처럼 가해자 역시 그렇게 풀려난 것이다. 김용갑을 죽게 한 가해자가 기소후 6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정말 우연이었을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누구나 두려운 생각을 갖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공포는 또 다른 예언이 흘러 다니면서 더욱 커지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 다니던 또 하나의 예언은 다름 아닌, '다음 차례는 고상만'이라는 말이었다.
출처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말은 모든 이들을 더욱 공포로 밀어 넣었다.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한 누군가는 군 입대를 핑계로 도망치듯 사라졌고 또 어떤 여자 동기는 아무 말도 없이 홀연히 학교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하나 둘 사라져 가는 빈 자리에서 나 역시 두려웠다. 아니, 고백하자면 '할 수만 있다면' 나 역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양심'이었다. 함께 싸우던 김용갑은 죽었는데 '나는 살겠다'고 도망간다는 것이 청년이었던 내 양심에서 '죽기 보다' 더 끔찍했다. 살고 싶다는, 정말 무섭고 두렵다는 공포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내 양심 사이에서 나는 괴로웠다. 매일 밤 마음으로 도망쳤고 반면 아침이 되면 학교로 올라와 대자보와 유인물을 쓰면서 하루 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 고통스러운 지경에서 내가 만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집어든 한 권의 책이었다. 오래전 어떤 경위로 얻은 책인지 모르겠으나 책상 한 켠에 꽂아 두고 한번도 읽지 않았던 책. 그런데 그날 우연히 떠들어본 책갈피 사이에서 나는 운명적인 한 남자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 바로 '김병곤'이었다. 그리고 그 김병곤을 통해 나는 마침내 내 공포를 이기는 답을 찾았다.
사형 선고에 "영광입니다" 했던 김병곤
'낯선 이름' 김병곤. 그는 1953년 2월에 경남 김해군에서 태어나 1990년 12월 생을 마감한 분이다. 생전 6번이나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을 가야 했던 그는 두 딸의 아버지로서 선후배로부터 존경받는 뛰어난 민주화 운동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런 김병곤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1988년의 일이었다.
1987년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 당시 부정선거 의혹으로 구로구청 점거 농성이 벌어지자 그는 현장을 지휘하는 역할을 자임했고 결국 이로 인해 6번째 투옥이 된다. 그런데 그 6번째 수감 생활중 진행성 위암 3기 판정을 받으면서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분이다.
그런 김병곤의 일생 중에서 내가 처음 마주하게 된 일화는 바로 19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재판 받던 날의 이야기였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독재를 선포한 후 대한민국은 공포의 공화국이 되었다. 이럴 때 먼저 일어선 이들은 바로 대학생이었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맞서고자 대학생들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약칭 '민청학련'을 결성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민청학련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2005년 국정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조사한 발표에 따르면 당시 발전위는 "순수한 반정부 시위를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산주의자라고 왜곡한 학생 탄압사건"이라며 국가 배상을 권고한다. 이후 법원은 이 사건 관련자에 대해 재심을 열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사건이 있었던 당시에는 달랐다.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웠던 유신독재 권력은 말만 재판이었지 실제로는 사법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김병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민청학련 사건의 관계자였던 김병곤을 비롯하여 훗날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 유인태, 여정남(훗날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집행), 이현배 등에게 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것이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이라도 사형을 구형받으면 제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는다고 한다.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그러나 이날, 김병곤은 달랐다고 한다. 군 검찰관의 사형 구형후 최후진술을 하라는 재판장의 말에 김병곤의 첫마디는 놀랍게도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였다.
김병곤의 말에, 이번에는 방청객들이 놀랐다. 자기를 죽이겠다는 사형 구형에 고맙다는 말을, 그것도 영광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어지는 김병곤의 최후 진술 전문이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러운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김병곤 평전 –p214)
내 비겁함을 깨우쳐준 스승 김병곤, 평전을 읽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날 김병곤은 영광이라는 말을 했을까. 훗날 감형받아 석방된 그에게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김병곤은 "독재권력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언젠가는 세워질 민주정부 시대가 온다면 그때는 훈장을 받는다는 것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영광스럽다고 말한 것"이라고 답했다.
나는 이런 김병곤의 일화를 말 그대로 빨아들이듯 읽었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그 길 위에서 받은 사형 구형에 '영광입니다'를 외친 김병곤을 통해 내 안의 비겁함을 진심으로 털어낼 수 있었다. 두렵고 무서웠던 마음 대신 '설령 그 길 위에서 내가 죽어도 좋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내 삶의 길은 달라졌다.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 없어' 버텼던 내 의무감에서 비로소 벗어나 그 어떤 결말에도 '영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설령 그러다가 내가 원치 않는 비극을 당한다 할지라도 먼 훗날 나를 기억하는 또 다른 이들이 내 이름 옆에 또 다른 의미의 훈장을 주리라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그런 김병곤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 지난해 11월, 평전으로 세상에 나왔다. 김현서 작가가 써낸 이 책은 김병곤이라는 인물이 살아낸 1971년 대학 입학부터 생애를 마친 1990년까지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오롯이 담았다. 박정희 유신독재를 거쳐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시기에 있었던 그 시절의 주요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불의에 맞선 양심 세력들의 저항을 다양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김병곤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만 28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던 독재가 지나고 나면 훗날 민주시대에서는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삶에 훈장을 주리라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번의 민주정부가 지나고 세 번째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김병곤에게 훈장은 수여되지 못했다.
나는 이 평전이 김병곤에게 '또 다른 의미의 훈장'으로 여겨지기를 기대한다. 그렇기에 많은 분들이 이 책 '김병곤 평전'을 통해 그의 생애를 읽어주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헌정하는 진정한 훈장이라고 믿는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모든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김병곤 평전>(김현서)ㅣ실천문학사 ㅣ2017.11.24. ㅣ2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