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방과후 수업 금지'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뜨겁습니다. 교육부는 올 3월부터 시행되는 '초등학교 1·2학년 영어 방과후 학교과정 금지' 방침에 맞춰 유치원·어린이집 방과후 영어수업도 금지하려 했지만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로 일단 한발 물러섰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학부모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
큰딸이 태어나고 50일 즈음, 아이의 발달을 '급' 당긴 적 있었다. 모자란 참을성과 지나친 욕심으로 빚은 작품이었다.
친구가 아이의 탄생을 축하해주며 딸랑이 세트를 선물했다. 파스텔톤의 작은 구슬들이 굴러다니는 '쪼르륵'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이가 직접 쥐고 흔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모빌도 또렷하게 못 보는 작은 꼬물이에게는 너무 큰 기대였다. 당연히 딸랑이를 갖고 놀 줄 몰랐다. 시범이랍시고 딸랑이를 요란하게 흔들어보았지만 아이는 눈만 끔벅였다.
포기하려는 찰나, 아기가 엄마 손가락만 대면 꼭 쥐고 놓칠 않았다. 손에 닿는 것을 무조건 잡는 '쥐기 반사'! 이거다 싶었다. 묘수가 떠올랐다. 주먹 쥔 딸 손을 억지로 펴서 딸랑이를 밀어 넣었다. 힘이 부족해 딸랑이가 떨어졌다. 그러기를 여러 번, 제법 쥔 모양새가 나왔다. 중요한 순간을 놓칠세라 얼른 스마트폰을 켜고 촬영 버튼을 눌렀다.
"생후 50일 된 우리 아기, 딸랑이 갖고 놉니다. 굉장하죠?"가족 카톡방에 생생한 기쁨을 공유했다. 잠시 후, 엄마 욕심에 놀아난 천진한 천사는 피곤한지 딸랑이를 툭 떨어뜨렸다.
때가 되면 다 하게 된다는 시간이 지나 알게 됐다. 그렇지만 육아는 산 넘어 산이었다. 조급증은 계속됐다.
"Baby shark~" 아이에게 슬쩍 내민 영어 노래
"이거는 누구야?"큰딸이 어느덧 궁금한 게 많은 4살이 됐다. 말문이 막 트인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멀쩡한 '사람'에게 '이것'이라 말했다.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웃에게는 '이 분'이라 말해야 해!"라고 타박하며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뜨곤 했다. 이럴 땐 참 당황스럽지만, 어설프게나마 우리말을 배우느라 신이 난 딸을 보면 기특했다.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들리는 말을 다 따라 하기에 아이 동요 사이에 슬며시 영어 동요를 끼워놓는다.
"Baby shark doo doodoodoodoodoo~"(아기 상어 뚜루루뚜루~)무슨 뜻인지 모를 게 뻔하지만 어쨌거나 '베비샥'을 외쳐대는 모습을 보고, 나의 입꼬리는 살짝 상승했다. 좋아하는 노래도 듣고, 영어도 자연스럽게 접하니 일거양득이었다.
조그만 입술에서 ABC 소리가 들리니 흥이 났다. '뽀통령'(뽀로로)의 뒤를 잇는 분홍 여우(핑크퐁)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아이를 위해 중국어, 영어, 심지어 구구단 동요 사운드북을 비장하게 계산했다. 분홍 여우가 춤추는 그림을 보면서 좋아할 아이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러면서도 생후 50일 된 아기 손에 능력 밖의 딸랑이를 쥐여줬던 실수를 반복하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다행히 아이는 싫어하기는커녕 즐겁게 익히면서 춤추고 놀았고, 덕분에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던 중, 교육부에서 어린이집·유치원 영어 방과후 영어수업을 금지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발표 이후, 어린이집 학부모들이 모인 메신저 채팅방이 시끄러웠다. 남들은 정부가 영어 교육을 금지한다고 하니 편법으로라도 영어 프로그램을 하니 마니 고민하는데, 우리 어린이집은 아예 ABC 얘기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영어 공부를 앞서 하고 있음이 속속 드러나자 엄마들은 불안해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게 흘렀다. 휴직 교사 신분인 내가 한마디라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엄마, 영어 지금 안 시켜도 되는 거 맞아? 학교에서는 애들 어때?"마음이 복잡했다. 쉽게 답장할 수가 없었다.
어린이집 학부모들 채팅방에서 망설였던 이유우리나라는 영어를 외국어로 따로 배우는 EFL(English as Foreign Language) 환경이다. 그러니 일찍 접했든, 늦게 접했든 꾸준하게 파고든 아이들은 실력이 좋은 편이다. 학교 수업에서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이수할 수 있다. 경험상 정규 교육과정대로 초등학교 3학년에 영어를 시작한 아이들도 낯선 언어를 쏙쏙 잘 받아들였다. 게임하며 동기 유발하고, 노래하고 외치며 무아지경으로 영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아이들도, 교사도 만족스러웠다.
평가도 무난했다. 학습지에서 'Apple(사과)' 그림을 찾아 색칠하는 아이나, 영어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아이나, 교과서로 배운 'How are you today?(오늘 기분이 어때?)'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면 목표 달성이었다.
고민의 끝에는 안전한 학교 울타리 너머, 먹고 사는 문제가 있었다. 상급 학교 입시를 비롯해 좁은 취업 관문을 통과하려면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서슬퍼런 고용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학교 영어 이상의 실력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학교 영어는 선생님께 배운 만큼 노력하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학교 담장 밖 대한민국의 영어는 녹록지 않다. 결국 미래의 노동 시장에서 요구하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 아이들은 밤까지 영어 학원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육아휴직 전, 저녁 메뉴를 구상하며 타박타박 퇴근길을 걸을 때면 꼭 반 아이들을 한두 명 만나곤 했다. 같은 건물 현관으로 들어가서 선생님인 나는 1층에서 반찬거리를 사고, 제자는 식사를 거른 채 3층 영어학원으로 향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왜 힘들게 학원을 계속 다니는지는 수업 시간이 돼서야 짐작할 수 있었다. 땅거미 질 무렵까지 학원에서 주 5회 영어 수업을 배운 아이들은 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 자신감이 치솟았다. 교과서 영어가 쉬운 그들은 당연히 학습 목표를 쉽게 달성했다. 아니, 달성한 상태로 학교에 왔다. 교육과정 성취기준 도달을 목표로 하지 않고,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 미리 내달렸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시간을 들여 많이 공부할수록 성과가 좋아진다. 영어에만 한정되지 않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뻔한 이치였다.
질문을 던진 어린이집 학부모에게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스마트폰 키패드를 눌렀다.
"투입이 있으면 산출도 나오더라고요." 덧붙여 우리 딸에게 자주 영어 노래를 불러주면서, 슬쩍 '엄마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학습량과 학업성취도가 비례한다는 사실도 재확인해줬다.
물론 사랑으로 보듬어 키운 아이가 낯선 언어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모르는 모습, 자세히 보면 마음 아픈 일이다. 알파벳을 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아이를 앞에 두고 부모는 천 번도 넘게 흔들린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면 학창시절과 대학 입시는 물론 험난한 취업 준비 과정에도 큰 도움이 된다. 그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쉽고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무리해서라도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시키는 이유다. 그게 주변 학부모들이 영어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교육부는 학부모들의 의견에 따라 유치원·어린이집 방과후 영어수업 금지 정책 시행을 일단 보류하고, 내년 초까지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16일 발표했다.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며 정부의 신중한 결정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