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 외척 세력들의 세도 정치에 의하여 왕권이 땅에 떨어진 것을 개탄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내세워 익종비 조대비와 밀약을 하고 자신의 아들을 철종의 양자로 입적을 시켜 왕의 생부로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어린 자신의 아들 고종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발호하는 외척 세력들을 누르기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실시한다. 그 중의 하나가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나서 30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으로부터 원납전이라는 명목으로 기부금을 받았고, 4대문을 통과하는 우마차에는 통행세를 부과하기도 하고, 결두전을 신설하여 혼인한 모든 백성들에게 인두세도 징수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화폐가치보다 백 배나 되는 당백전을 찍어내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화폐의 유통질서를 어지럽혀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경복궁 타령'이란 노래가 불려졌겠는가?
그렇지만 요즘 와서 평가를 해 본다면 그렇게 임진왜란 때 불타서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그것도 7800여 칸으로 자금성을 방불케할 정도의 엄청난 규모로 복원을 해 놓았기 때문에 요즘 우리나라를 찾고 있는 중국, 일본은 물론 많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의 문화의 뿌리가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것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흥선대원군이 조대비와 협력하여 야심차게 경복궁을 재건할 때 고종과 왕비 민씨는 자신들이 거처하면서 정사를 돌보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내탕금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건천궁'을 건립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건청궁을 지은 것이다. 일종의 왕의 비자금인 내탕금을 동원하여 신하들도 모르게 '건청궁'을 짓다가 이를 알게 된 신하들이 크게 반대를 한다. 그렇지만 고종과 왕비 민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건청궁 건립을 밀어붙여 경복궁 안에 있는 또 하나의 궁을 지은 것이다.
건천궁은 전각 등 궁궐의 건축 양식과는 달리 양반 사대부들의 집과 같이 소박하게 지었다. 단청도 하지 않고, 문도 삼문을 내지 않고 하나의 문으로 내었다. 보통 궁궐의 전각들이 둥근 기둥을 사용하여 짓지만 이곳 건청궁의 건물들은 다 네모기둥을 이용하는 등 임금과 왕비의 거처와 집무공간과는 다른 격식으로 지은 것이다.
양반가의 사랑채와 같이 장안당과 안채인 곤녕합, 부속채인 복수당 등으로 250칸의 건물을 지은 것이다. 더구나 이 건청궁에는 동양에서는 최초로 전기불이 밝혀졌다는 것도 사뭇 의의가 있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 지 10년만에 동양에서는 이곳 건천궁에 최초로 전기가 가설이 되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부부금슬이 좋은 고종과 왕후 민씨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품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독립된 공간에서 왕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민씨 일가 등 자신들의 세력들을 앞장세워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명성황후의 야심이 맞아 떨어져서 지어진 궁으로 보인다.
건청궁 안에는 고종이 기거하면서 정사를 돌보고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사랑채와 같은 장안당(長安堂) 건물이 있고, 그 장안당에서 회랑을 통하여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연결되어 있는 곤녕합(坤寧閤)이 왕비 민씨가 거처하는 것을 보면 왕과 왕비가 지척의 거리에 있으면서 국내외적으로 아주 복잡한 시기에 흥선대원군을 멀리하면서 자신들의 통치권을 확립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876년에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갔다가 10년 후인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온다. 그런 것을 보면 고종과 왕비 민씨가 얼마나 건청궁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왕비 민씨는 이 건청궁에서 자기 친정의 민씨와 그외 자신의 세력들을 규합하여 통치행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청과 러시아 등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재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이용하였지만 이런 야심은 결국 일본에 의하여 이곳에서 비참한 자신의 최후를 맞게 된다.
문화재를 복원할 때는...한편 명성황후가 최후를 맞은 공간이 옥호루(玉壺樓)인데, 이 옥호루에 대하여, '옥곤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壺'를 '항아리 호'로 읽을 것이 아니라 '땅 곤' 또는 '대궐길 곤'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건청궁 안내판이라든가 여러 공식적인 기록에는 '옥호루'로 읽고 있다.
아무튼 궁궐 안의 궁궐, '건청궁(乾淸宮)'에서 왕비 민씨는 시해를 당하고, 고종은 유폐되다시피 하다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가는 수모를 당하는 비운의 궁궐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도 많지를 않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정도 지낸 고종은 왕비 민씨가 시해당했던 건청궁이 정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건청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덕수궁을 새로 지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죽은 왕비도 시호를 '명성황후'라고 내렸지만 이미 기울어져 가는 나라가 제국을 선포했다고 없는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맺고 국권이 뺏기더니 고종 자신도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퇴위를 하고, 명성황후의 아들인 순종이 즉위했지만 그를 마지막으로 결국은 일본에 강제 합방되는 비극을 맞고 말았다.
일제는 이곳을 1909년 헐어버리고 일제 감점기 때는 이곳을 미술관으로 활용하던 것을 근래에 재건하였다. 옛날의 건천궁을 그대로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옛날 건천궁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많이 현대식 건축 양식으로 개선된 느낌이 든다.
새로 재건을 하면서 단 '옥호루'의 현판 등을 보면, 옛날 사진과 달리 검은 바탕에 흰 글씨를 썼고, 두인과 낙관이 없으며, 테두리 문양도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어 원형대로 제대로 복원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근래에 경복궁 재건을 하면서 국내산 적송 등이 부족하여 캐나다산을 사용하여 복원한다는 것도 꺼림찍은 하지만 재료가 없어서 외국산을 사용해야만 한다니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그리고 향원정과 건청궁을 잇는 나무다리가 일제 때 남쪽으로 옮겨진 것을 원래 있던 자리도 복원을 하고, 향원정도 수리를 한다고 하니 잘 하는 일인 것이다.